▲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안중 교사 |
그러던 중 2012년 6월 2일 대전시 동구의 역사와 문화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이사동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장촌을 찾아 학술조사를 하다가 김옥균의 출생지가 이사동이라는 안내간판을 우연히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충남도와 공주시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김옥균의 출생지로 보고,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제 충남도는 1976년 12월 6일 김옥균 생가지인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충남 기념물 제13호로 지정, 공표했고 공주시는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에 유허비를 건립하고 안내판까지 건립해 놓았다.
그래서 필자는 이사동 135-2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송진국(69)씨 댁을 방문해 사우당효정공파종중(四友堂孝貞公派宗中)이 1984년 3월 대전 회상사(回想社)에서 발간한 족보인 『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을 잠깐 빌려보았는데, 거기엔 '김병태 자 김옥균 문과호조참판(炳台 子 玉均 文科戶曹參判)'으로 기록돼 있어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족보에는 김옥균의 외조부인 송인덕이 이조참판을 증여받았다는 사실과 외숙인 송인식이 선비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옥균의 생모는 '은진 송씨'로만 기록돼 있어 성함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난 6월 6일 안동김씨 족보편찬을 주도해 온 김은진(84)씨 증언에 의하면, 안동김씨 대동보소가 1984년 12월 농경출판사에서 간행한 족보인 『안동김씨 대동보 5권』에는 김옥균의 출생지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기록되어 있고, 김옥균의 생모는 '은진송씨'로만 기록돼 있어 생모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송진국씨와 김은진씨에게 이 족보들에 왜 김옥균의 생모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더니, 원래 은진송씨 족보와 안동김씨 족보에는 어느 파의 족보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여자의 이름은 관행으로 기록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답변해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왜 이제까지 김옥균의 출생지를 정확하게 바로잡지 않았는지 궁금해 대전 동구문화원에서 2006년에 발간한 한상수 저 『은진송씨 집장촌 이사동』 김옥균 편을 찾아보았다. 한상수 선생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 초에 남자가 1년 또는 2~3년간 처가살이 하는 풍습인 서류부가제도가 있어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의 안산 모랭이 산 아래 위치했던 처갓집인 송인식의 집에서 결혼 초에 처가살이 할 때인 1851년 1월 23일에 김옥균이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행정체제를 갖추지 않아 출생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출생한 지 21일 이내로 출생신고해야 하는 제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생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지 않았다. 다만 반상(班常)을 구별하기 위해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각종 기록을 보면 시조의 고향이 되는 관향(貫鄕)만 표기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부계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신생아의 본적지는 아버지의 본적지를 따르는 것이 상례로 돼 있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김옥균의 생가지가 대전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병태의 본적지인 공주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로 잘못 기록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당시 실제로 살아보지 않아 두 곳 중 어느 곳이 김옥균의 출생지인 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의 기록, 김옥균 출생 당시의 처가살이 풍습인 서류부가제도 등으로 미루어보아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인 것 같은 심증이 간다.
아무튼 앞으로 빨리 역사학자들이 정확한 고증으로 김옥균의 생가지를 확실하게 밝혀 더 이상 불필요한 김옥균 생가지 논란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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