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순택 논설위원 |
올림픽을 앞두고는 다짐을 하곤 했다. 메달을 좇기보다 가슴에 단 태극마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리라는 다짐. 베이징올림픽 때도 그랬다. '아시아인은 안 된다'는 수영 자유형에서 금물살을 가른 박태환의 신화에 환호하면서, 부상으로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바벨을 놓지 않은 이배영에게도 손이 부서져라 갈채를 보냈다. 우리 선수뿐이 아니다. 의족을 하고 수영경기에 참가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탈리 뒤 투아, 포탄을 피해 달리기 연습을 했다는 팔레스타인의 나데르알 마스리도 기억난다. 이들을 만나는 날, 나는 저녁 대신 감동을 먹었다.
올림픽 때마다 번번이 다짐을 했다는 것은 다짐을 해도 메달 색깔에 자꾸 눈이 가더라는 고백이다. 하기야 친구들끼리 축구를 해도 이기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올림픽이라고 다르겠는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 올림픽의 이 멋진 신조도 실은 지저분한 승부욕 탓에 나왔다.
런던올림픽은 이번이 세 번째다. 1948년 7월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올림픽 참가를 위해 런던으로 향하던 67명의 대한민국 선수단의 가슴은 뿌듯한 감격으로 벅찼을 것이다. 런던은 1908년에도 올림픽을 유치했다. 이 올림픽은 영국과 미국, 두 나라의 대립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메인스타디움의 이름을 따 '셰퍼드 부시의 전투(The Battle of Shepherd's Bush)'로 불린다. 스포츠를 신사의 순수한 여가문화로 여겼던 영국은 미국이 대표선수 훈련에 재정 지원을 했다는 소식에 천박하다고 비난하며 개회식장에 미국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다. 미국 선수단은 입장하면서 영국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으로 보복했다. 영국 줄다리기 팀은 강철 테가 부착된 부츠를 신고 있었다. 운동화를 신은 미국 팀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400m달리기에선 영국 선수가 3위를 하자 1, 2위로 들어온 미국 선수들이 진로를 방해했다며 재경기를 선언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미국 선수들은 재경기를 거부했고 영국 선수는 혼자 뛰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영국과 미국 선수들의 감정대립이 도를 넘어서자 영국 국교회의 탈봇(Talbot) 주교는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다”며 자제를 촉구했고, 쿠베르탱 IOC위원장은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노력이다. 본질적인 것은 정복이 아니라 훌륭하게 싸우는 것”이라고 타일렀다. 천박한 경쟁에 던져진 충고들이 묶여서 1934년 LA올림픽에 와 '올림픽 신조(Olympic Creed)'가 되었던 것.
이번 올림픽만큼은 메달 경쟁에 눈 돌리지 않고 선수 개개인의 열정에 환호하고 싶다. 그들의 성취나 아쉬움이 우리 고된 일상에 던질 다양한 의미를 생각해 볼 것이다. 가능하다면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가 그의 작품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느꼈다던 희열을 느껴 보고도 싶다.
“그날 내가 20등, 30등에서 꼴찌 주자에게까지 보낸 열심스러운 박수갈채는 몇 년 전 박신자 선수한테 보낸 환호만큼이나 신나는 것이었고, 더 깊이 감동스러운 것이었고, 더 육친애(肉親愛)적인 것이었고, 전혀 새로운 희열을 동반한 것이었다.”
지금 나라 안에선 다른 의미의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여당과 야당 대선주자들이 벌이는 경선이란 이름의 올림픽이다.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의 정신은 휴머니티ㆍ건강ㆍ사랑ㆍ성취ㆍ최선ㆍ인내ㆍ배려ㆍ신사도 같은 인간다움의 발로다. 경선 올림픽이라고 다를 게 없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 도덕성에 더해 나라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이 사람만 믿고 따르면 5년 후엔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바라는 지도자는 당장 표가 안 되더라도, 진정 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면 당당하게 말하고 밀고 갈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꼴찌 한들 어떠랴. 국민들은 기꺼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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