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늘 다니던 길도 또 나서면 새롭다. 동행 있으면 더 좋다. 의외의 발견. 어이없는 실수. 이런 게 어우러진다. 서로의 재확인도 이루어진다. 함께 길가는 이의 인생과 내가 합쳐진다. 이럴 때 길 좀 잃어버리면 어떨까? 일상에서야 그랬다간 한참 뒤쳐진다. 그러니 행여 이 삶에서 질까 꼭 붙들고 산다. 길 잃을까 노심초사. 어디 한시라도 편한 날 있나. 여행길만이라도 그런 걱정 내려놓으면 좋겠다. 아등바등 잊지 않고 잃지 않으려 하면 재미 달아난다. 다행스럽게도 길 잃어도 행복감 느끼는 건 가능하다. 그런 곳 있다.
먼저 캔버라. 양모업자들이 만든 거리. 양의 등 같은 가지런함. 길 잃으면 주유소 servo에 들른다. 알려 준대로 가다 양떼 만나기도 한다. 괜찮다. 이름의 어원이 만남의 장소다. 이스탄불은 제국 셋의 수도였다. 황제의 도읍. 헤매야 그 영광 알게 된다. 길 잃어도 걱정할 게 없다. 찻집에 들어간다. 버찌주스로 목 축이며 길 묻기만 하면 된다. 런던은 보이는 게 다 역사다. 여기서 길 잃어야 해지는 날 없었다던 대영제국 실감. 오늘 속에 살아있는 과거에 취해 길 잃는다. 지하철 타면 걱정 끝. 1863년 개통된 명물이다.
도쿄의 생명력은 주민의 친절에 있다. 길 모르겠거들랑 아무에게나 물어본다. 데려다 줄 정도다. 노인네 손에 끌려 황궁 구경했다. 베니스는 물의 도시다. 굳이 물에 빠질 필요야 없다. 곳곳에 산재한 르네상스의 흔적. 인문학의 향기 속에서 길 잃으면? 리알토 찾아가면 된다. 그게 뭐냐고? 랜드 마크 다리다.
바라나시는 갠지스 강변도시다. 인도인들은 확실한 이정표 갖고 사는 인간은 없다고 믿는다. 길 잘 모르고 길 잘 잃기 십상인 존재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인생 알려고 여기에 온다. 이쪽에서는 장례 치른다. 저쪽에서는 산 사람이 목욕재계한다. 정답 얻지 못 한 채 귀로에 오른다. 영혼의 길은 언제나 미로라 생각하며 돌아간다. 현실의 길은 오죽 하겠는가 한다.
내 곁에도 길 잃어도 맘 편한 곳 있다. 내 고향 장항이다. 거기선 요즘 깜빡깜빡 길 잃곤 한다. 그럴 때 뭔가 깨닫는다. 어라, 이거 변한 게 한둘이 아니구나.
저번에도 창선동 집 찾기 실패! 아직 거기서 버티고 사는 준모 형에게 묻는다. 바로 저기잖아 한다. 그제야 기억창고가 되살아난다. 길눈 그렇게 어둡냐 하시는 할머니. 거기 계셨다.
요즘 같은 장마철 비오는 날 마당. 그 안에 서 계셨다. 싸릿대로 땅바닥 찰싹찰싹 치셨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뱀. 되돌아 나가게 하셨다. 결코 잡으려 하진 않으신다.
그러면서 오늘도 동무들이랑 뱀 잡았느냐 물으셨다. 그 미물도 생명이다. 그러면 안 된다 하셨다. 어울려서 어쩔 수 없이 했느냐. 꼭 나뭇가지에 걸어 놓으라고 이르셨다. 그렇지 않으면 변 당한다. 저번처럼 몰래 장독대 뒤에서 오줌 싸면 큰일 난다. 각시 뱀이 신랑 뱀 원수 갚는다. 네 고추 꽉 문다 어르셨다. 정말? 뒷담 텃밭으로 도망친다. 마침 쇠비름 가지 끝에 노랗게 꽃 피었다. 뽑아서 뿌리 훑는다. 흰색이 붉게 변한다. 재미있어 뽑아댄다. 할머니는 많이 뽑아 오너라고 하신다. 물에 데치고 말려 겨울나물 만드신다.
먹으면 장수한다는 장명채(長命菜). 정작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단명. 어머니와 아버지도 일찍 작고. 나는 할머니가 무친 나물 그 이름 장명채와 그 꽃말 애정 덕에 오래 살아내는가. 장마 끝나고 피는 작디작은 꽃. 개망초. 꽃무리 왼쪽으로 어망공장. 이어지는 안남미 창고. 더 가면 도선장. 내비에 아웃소싱 한 기억 환수했다. 그러자 뇌리 속 생생지도 재생됐다.
온몸 뒤틀린 장근이. 구걸해온 왕사탕 내미는 손 보인다. 그 앞이 살던 집. 잃어버림과도 화해한다. 개망초 덕분이다. 정신 놓고 살지는 않을 거 같다. 철들었나. 나하고 내 고향 구경 갈 사람은 연락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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