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부여군수 |
19세기 말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역사는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동 시대의 조선, 일본, 청나라는 전 세계를 휩쓴 개항이라는 파도 앞에서 선진국의 해외시찰을 통한 부국강병의 서로 다른 위기해법을 내놓았지만 이후 전혀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 우선, 강화도조약(1876)의 체결로 조선은 해외에 문호를 처음 개방하고 동시에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2차 일본의 수신사 파견이후 1881년의 조선의 일본 조사 시찰단, 1881년 청에 파견된 영선사, 1883년 미국에 처녀 진출한 보빙사(報聘使)는 개화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개화파들의 해외견문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반쪽자리 개혁과 척양비(斥洋碑)를 등에 업은 위정척사파의 거센 반발로 시찰결과의 피드백 파이프 라인은 단절되게 된다.
청나라도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양무운동의 핵심이자 개혁과 개방의 선두주자인 리홍장이 1872년 대규모 해외연수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낡고 지친 중국을 변혁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국가의 명운을 걸고 9~15세의 아이들을 해마다 30명씩 187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모두 120명의 국비유학생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수구논리로 유학 프로젝트는 1881년에 중도하차하고 만다. 중국으로 돌아온 유학생들은 뜨거운 환영을 기대했지만 이들의 운명은 구제도의 벽에 가로막혀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반면, 일본은 유신 초기인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명명된 대규모 정부 사절단이 구미로 파견됐다.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의 핵심 세력이 참가하였고, 수행원과 유학생을 포함해 106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약 2년간에 걸쳐 정부 핵심의 자리를 비우고 서구를 순방하게 되었고 이들이 보고 배운 해외 견문은 에도 일본에서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했던 일본 실학자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명치 일본건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과거 성찰은 역사의 교훈을 만드는 열쇠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강조했던 영국 역사학자 EH카의 말처럼 지난 역사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오늘날 공무원의 해외연수를 두고 말들이 많다. 연수, 시찰보다는 외유성 관광이라고 지탄받고 있다. 그러나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법과 내용이 문제다. 연수 참가자들이 선진행정 벤치마킹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나 지자체에 반영할 수 있는 연수과제를 직접 설정하고, 이에 따른 연수지역과 방문기관 등을 사전에 조사하는 등 완벽한 해외문화체험 연수 준비에 나서야 한다. 또한, 피드백을 위해 해외문화체험 연수 후에는 선진시책 등을 정리한 연수보고서를 팀별로 작성해 내부 행정망을 통해 게시하는 것은 물론 직원 월례모임 등 각종 회의와 연계한 발표회를 개최함으로써 직원간 정보공유의 계기 마련을 통해 공직자의 글로벌 역량강화를 위한 기회가 돼야 한다.
특히, 국가나 지자체의 내부 조직문화도 공직자들이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대응할 국제적인 안목과 문제해결능력을 배양하고 국가나 지역 발전에 접목할 다양한 정보 및 시책을 벤치마킹해 선진행정을 구현할 수 있도록 공무원 해외문화체험 연수에 적극 나서야 하며, 지자체의 국제교류도 이제는 지역자원을 적극 활용해 지역 경제를 견인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원이 창출될 수 있는 교류지역의 다변화와 실리외교에 적극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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