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태 변호사 |
그러나 며칠 지나면 이내 익숙해지고 오히려 정까지 들게 된다. 퇴근 무렵이 되면 '깜지'생각이 나는 것이다. 때론 하루 종일 혼자 놔둘 수밖에 없을 때에는 걱정이 앞선다. 요즈음 강아지들이 예민한 탓인지 이처럼 온종일 혼자 놔두면 이리저리 집안을 돌아다니며 소변을 지려놓고 때로 토해놓기까지 한다. 대단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가능한 한 혼자 있도록 놔두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함께 있으면서 과자를 나누어 먹기도 하고 몸을 간질이면서 장난치며 놀아주기도 한다. 이때의 '깜지'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주인이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심지어 심심하지 않게 함께 놀아주고 있는 그 때의 '깜지'의 심정은 무엇일까? 요사이 흔히 쓰는 과장법을 사용한다면 행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토피아도 '깜지'의 행복한 생활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이 '행복'이고 유토피아라면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아무래도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주인은 '깜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고 있는데도 그러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왜일까? 이것은 아마도 행복이 주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행복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자발성이 없는 남에 의하여 이루어진 행복인 것이다. 요사이 복지논쟁이 한창인데 그 복지라는 의미가 왠지 '깜지'의 행복과 같은 것이라고 느껴졌다.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의 다툼 속에서도 여전히 복지란 무료로 베풀어지는 행복(?) 이외에 달리 아니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툼을 보면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가 떠올랐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면에서 다른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행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아이를 낳는 법이 없다. 공장에서 인간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장에서 생산될 때부터 인간은 다섯 계층으로 나뉘어 만들어지게 되고 최상위계층 알파로부터 최하위계층 입실론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주어진 능력과 업무에 맞게 생산되고 훈육되어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들은 이미 어린 시절 훈육되는 과정에서 불평불만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업무나 다른 일로부터 오는 공포나 스트레스는 '소마'라는 환각제에 의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은 모든 결핍을 느끼는 순간 즉각적으로 충족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행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 된 것이다. 바로 이들이 사는 곳이 멋진 신세계,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보편적 복지의 종착역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의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이끌고 가는 이러한 상상의 세계는 현실을 무시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요구하는 복지가 멋진 신세계에서의 인간들이 요구하는 결핍으로부터 즉각적인 해방과 많이 다른 것일까?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린아이가 떼를 쓰면 예외없이 반응하는 부모들 같은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게 된다. 이것은 분명 멋진 신세계를 지배하던 무스타파 몬드가 비웃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과 그리 멀리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맛이 들린 복지의 단맛을 사람들로부터 빼앗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복지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가려고 한다. 얼마 안 있어 동강 난 철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국가의 재정위기가 반드시 복지예산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유럽 여러 나라의 재정위기를 보면서 분명 복지예산이 이러한 위기의 한 원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쟁하고 있는 복지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복지란 인간행복을 위한 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멋진 신세계'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한다. 진정 그대들은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러면 스스로 행복을 찾아가라.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그곳에서 바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진정한 복지란 우리 자신 속에 있었던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