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6월 27일 밤 9시께 대통령은 전화를 통하여 육성 방송을 내보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 집무하고 있으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대통령의 육성을 들은 서울시민들은 안심했다. 피란을 떠나려던 차 대통령이 직접 방송하는 것을 듣고 발길을 돌린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다. 대통령의 육성이 대전에서 서울로 전화선을 타고 방송으로 나가는 줄 아마 귀신도 눈치를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대통령은 다시 지시를 내린다. 6월 28일 새벽 2시였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제대로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리 위로는 피란민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밤중에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전쟁 발발 나흘 만에 서울은 적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그 나흘 동안 대통령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되풀이했다. 대구로 내려갔다 다시 대전으로 올라오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것처럼 꾸며 국민을 상대로 기만 방송을 했고 급기야 피란민들이 건너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대통령이 대전을 떠난 것은 7월 1일 자정 무렵이었다. 시시각각 내려오는 전황에 이 북진통일의 주창자는 재빨리 부산으로 피란길을 잡았다. 이번에도 대통령 단독이었고 역시 한밤중에 진행된 행보였다. 자고 있는 비서들을 깨워 남행을 재촉했다고 하니 그 긴박했던 주변 정황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피란은 쉽지 않았다. 추풍령에 공비가 출몰한다는 첩보가 날아든 것이다. 급기야 대통령의 남행은 당일날 익산, 다음날 목포를 거쳐 군함을 타고 남해바다를 길게 돌아 부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 어이없는 역사의 한 토막이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대전에 도착한 것은 7월 3일, 대통령이 대전을 떠난 다음날이었다. 미국이 가장 먼저 보낸 전투부대가 24사단이었다. 딘 소장은 24사단 사단장이었다. 딘 소장은 악천후를 뚫고 일본에서 건너와 관제탑과 활주로 등이 부실한 대전 비행장에 위험을 무릅쓰고 착륙을 감행했다. 그 시각 인민군 주력부대는 한강을 건너왔고 뒤이어 오산, 천안, 조치원 등 우리측 방어선이 잇달아 허물어졌다. 딘 소장은 대전 사수로 작전목표를 수정하고 신탄진 철교와 금강 다리를 폭파했다. 7월 13일이었다.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대전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시가전을 치르는 사이 미24사단은 참담한 전투력 손실을 경험하고 옥천, 영동 방향으로 퇴각을 결정한다. 그 시각에 딘 소장은 부관 1명, 한국인 통역 1명, 그리고 운전병 1명과 함께 대전차포를 짊어지고 탱크 사냥에 나섰다. 마지막 퇴로를 이끌던 딘 소장은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만다. 그 후 한 달여 동안 산속을 헤매다가 전라북도 진안에서 한 한국인의 밀고로 인민군 포로가 된다. 그는 종전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으니 3년이 넘게 포로생활을 경험한 것이다.
전쟁 당시 실종된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기관차를 몰다가 적의 총탄에 순직한 김재현 기관사에게 미 국방성이 특별민간봉사훈장을 수여했다는 소식이다. 7월 19일 미 결사대원 33명과 한국인 기관사 3명을 태운 기관차는 총탄을 뚫고 대전역에 도착했지만 딘 소장 구출에는 실패하고 만다. 이 작전으로 미군 32명이 전사했고 김재현 기관사도 28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민간인 최고의 영예라는 훈장 수여 소식을 듣고 딘 소장을 기억해보았다. 논어 어디에선가 읽은 맹지반(孟之反) 고사도 떠오른다. 노나라 장수 맹지반이 군대의 후미에서 가장 늦게 성문으로 들어오며 말했다고 한다. “내가 뒤처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말이 너무 지쳐 늦었습니다.” 포로가 된 장군이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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