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ㆍ25전쟁이 일어난지 62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민족은 6ㆍ25전쟁으로 인해 혹할 정도로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적손실을 입었다. 3년 반 전쟁기간 동안 유엔군, 국군포함 18만명 전사, 인민군 52만명, 중공군 90만명 사망ㆍ실종, 민간인 99만명이 인민재판으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고, 수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이 납북 당한것으로 알려지는 등 한반도 산하를 폐허로 만드는 처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여파로 남한에서만 250만명에 달하는 피란민이 생겼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낳게한 그 전쟁의 세대가 아직도 가슴속의 응어리진 한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ㆍ25전쟁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실제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ㆍ25가 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으로 응답한 학생이 38%나 되었고, 5명중 1명꼴로 6ㆍ25가 일본과의 전쟁으로 알고 있는 등 자라나는 청소년들에 대한 보훈교육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보는 62주년을 맞아 동족상잔의 비극 6ㆍ25전쟁의 참혹함을 청소년은 물론 전후 세대에게 알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고자 당시 육군 중령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내가 겪은 6ㆍ25전쟁'을 와이드판으로 게재했다. <편집자 주>
▲ 이인구 명예회장의 6ㆍ25 참전 당시 모습 |
필자도 올해 82세를 넘기다 보니 이런 쓰잘데 없는 인생의 한계를 실감치 않을 수 없다.
이제 남은 일이란 처절했던 그 때 그 상황을 후세에 길이길이 알려 그때를 이겨낸 교훈과 경각심을 후배에게 깨닫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6ㆍ25발발 62주년을 맞이하여 당시의 실상과 아직도 전쟁 위험이 코앞에 와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노파심이 되기를 바라면서 대책을 간명코자한다.
6ㆍ25가 발발한 때는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새벽이며 그날은 주말이라 국민은 고이 잠들어 있던 평화로운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쾌청하고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그때 내 나이 만 17세, 구제중학교 5학년 1학기였다.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과 유성온천 대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복차림의 헌병 2명이 욕탕에 들어와 수동확성기로 “현역 장병은 급히 원대로 복귀하시오. 비상입니다”를 몇 번을 반복했다. 발가벗은 청년 몇 사람이 “제기랄 일요일에 무슨 비상이야”하며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 대전전투 후 폐허가 된 대전역 |
지금 대전시청이 있는 곳에 간이 비행장(K5)이 있었고 그곳에는 육군 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 정문 앞을 지나는데 부대출동준비로 부산했고, 차량과 복장은 완전 위장을 하고 있어서 휴전선 일대에서 전면전이 일어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여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와보니 우리가 존경하던 배속장교 전중위가 완전전투복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휴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남침을 해왔다. 아군이 밀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서울이 언제 함락될 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명에 따라 오늘밤 2사단과 함께 서울 북방 전선에 나간다. 이제 내가 전투에 참가하면 아마도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이 군인의 운명이다. 내가 여러분을 마지막으로 보고 작별하러 여기에 왔다.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비장한 연설을 들었다. 순간의 분위기는 착잡하고 무거웠다.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호국의 임무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전중위님을 송별하는 날입니다. 무운장구를 빌면서 소주파티나 합시다.”
소주 몇 병과 오징어를 사들고 조촐한 송별연을 치렀다. 내가 80평생 많은 송별연을 가졌지만 그때와 같이 비장한 송별은 지금껏 없었다고 회고한다. 후에 안 일이지만 전중위는 미아리 북쪽 전투에서 밀려오는 적의 전차를 잡기 위하여 육탄으로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이다.
▲ 6ㆍ25전쟁 당시 진지에 배치된 구경30기관총 |
우리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보문산 입구의 둥구나무 아래서 등교 체크만 하고 사실상 휴학에 들어갔다. 속절없이 대통령과 정부요인들은 남행하고 보이지 않았다.
7월 4일로 기억한다. “대전시민은 오늘 저녁내로 남쪽으로 피란을 가라. 일주일이면 미군이 대전을 지키고 귀향하라고 할 것이니 며칠분의 식량과 의복만 챙기고 떠나라”는 고지방송을 했다.
멀리 조치원 방향에서 울려오는 포성은 불길함을 예고하고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두메마을 효평리에 수삼명의 국군 후퇴장병이 찾아와 점심을 해달라고 하며 충북 음성 쪽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나는 친절하게 알려주었지만 동네사람들은 쉬쉬하고 외면하고 있었다.
우리 가정은 저녁식사를 마당에서 멍석을 깔아놓고 회식과 가족회의를 했다.
“할머니는 70세 노인이고, 어머니는 출산한 지 몇 개월밖에 안되고 간난아기(지금의 이시구 계룡건설 회장)를 업고 피란길을 나설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중학교를 가지 않은 어린 동생들은 할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잘 있거라. 얼마 후에 돌아온다.” 아버지는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집 뒤켠에 미리 준비해 둔 동굴을 설명해주며 “상황이 급할때는 그 동굴에 들어가 위급을 피해라”는 등 긴 회의가 이어졌다. 피란행렬에 동참하는 일행은 아버지, 숙부, 나, 이헌구 동생(중학 2년생)과 이웃에 사는 먼 집안 아저씨 2명 등 6명이었고, 피란 보따리라곤 쌀 1말, 쌀가루 1봉지, 된장, 고추장과 냄비하나 그리고 옷가지 몇 벌씩이었다.
으슥한 초여름 한 밤에 우리 일행은 그리운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몸 성히 돌아와요! 탈 없이 이겨내요!” 우리는 작별 아닌 생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는 총총 별빛이 빛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전~금산~영동~추풍령~김천~왜관~대구의 고달프고 지루한 긴 피란길을 서둘러야 했다.
국도와 지방도로는 피란민에게 금지구역이다. 군용 전담도로로 통제되고 우리는 논틀, 밭틀, 산능선으로만 가야한다.
하늘에는 수시로 국군 정찰기가 지나가고 영동, 추풍령 일대는 미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살벌한 전장(戰場)터로 변하고 있었다. 피란 간 시골 동네 둥구나무 아래서 잠을 잘 때는 멀리서 울려오는 포성이 일행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렇게 하여 10여일의 남행 피란 끝에 우리는 7월 중순에 대구에 도착했고 대구 달성군청에 마련된 대덕군 연락사무소에 피란민 신고를 하고 얼마만큼의 생활지원금을 받았다. 거기서 나는 대전, 청주에서 피란 내려온 학도 호군단 동지들을 찾아 만날 수 있었다.
7월 17일로 기억한다. 대구극장에서는 제헌절 기념 시국강연이 있었다. 국회 황성수 부의장의 강연이었다. 이 강연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강연이 끝나자 대전지구 호국단 요원들이 극장 앞 골목길에서 노상회의를 열었다.
“어젯밤에는 대구역구내에 박격포 3발이 작렬했다. 정부는 이미 부산으로 내려갔다. 또 오늘 대구 피란 명령이 하달되었다. 대구가 함락되면 대한민국은 끝장이다. 이제 젊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겠나? 학생은 학도병으로 지원하면 서울탈환 후 그리운 학교에 복학시켜 준다고 공약했다. 부산행 국도의 대구교외에 군모병소가 있으니 그리로 가서 학도병에 지원입대하자. 먼 훗날 우리도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의를 해 주었고 굳은 악수로 다짐을 했다. 그 때 동조한 학생은 약 50명이었다.
우리 학도병 지원일행은 가족과 함께 피란민 대열에 끼어 대구 교외 고산면에 있는 모병소 앞에 다다랐다.
“가족에게는 함구, 비밀로 하고 그곳에 도착하면 안면몰수하고 부대정문 앞에 모이자”는 약속은 그대로 지켜졌다.
우리 행동을 목격한 가족 어르신들의 충격은 말 할 수 없었다. “나를 두고 어디로 가는가? 제발!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아우성이다.
모병소 상사에게 “우리는 학도병 지원병입니다. 빨리 수습하여 영내로 인솔해 주십시오!” 소리쳤다. 위병소에서는 단호하게 처리해 주었다. 가족들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불효는 한번만 하면 된다. 먼 훗날 우리도 떳떳하고 가족 어르신들도 떳떳한 날이 반드시 온다.” 대열을 짓고 가는 학생들 간에 오간 이야기였다.
부대장 서윤택 중령이 직접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우리는 즉시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이튿날 각자에게 군번이 내려왔다. 나의 군번은 5601267 이인구 이등병이었다.
우리는 바로 내무생활과 제식훈련 등 군인생활 필수과목에 들어갔다. 밖에서 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면회를 신청했다.
“육군 이병 이인구 아버님 면회 왔습니다.” 하고 거수경례를 하며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먼 훗날 “나는 아끼는 아들로부터 크게 배신당했다. 그 길로 인구를 빼돌려 부산으로 가려 했는데 인구의 태도로 보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고 아버지께서는 회고하셨다.
나는 입영당시 입고 간 사복(학생복)과 사물 보따리를 동생에게 전해 주었다.
“이것은 내가 몰래 모아 놓았던 돈이다. 아버지를 잘 모시고 지켜 달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10분가량 준비해 온 엿과 떡을 나누어 먹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윽고 중대장이 먼 곳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육군이병 이인구 면회 끝났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거수경례를 하며 면회 장소를 나왔다. “무운장구, 제발 살아 돌아와 달라”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영한 지 3일만이다. 소문은 “대구가 위태하고 영천이 함락 직전에 있다”는 것이다.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 포항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고 대한민국은 끝장을 보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한참 제식교육을 받고 있던 우리는 예정 없이 사격장으로 이동했다. M1소총을 다루는 방법, 안전장치의 방법, 격발요령, 조준요령의 실습에 들어갔다.
“여러분은 오늘밤에 부대와 같이 영천전투에 투입된다. 마음의 준비를 해라”는 훈시와 “머리를 일부 자르고 손톱발톱을 깎아서 이 봉투에 넣어라. 만일 전사하고 시체를 못 찾을 때는 유골함에 넣을 주요한 작업이다”라고 했다. 숙연한 사후행사를 하면서 우리는 부대로 돌아와 출동준비에 들어갔다.
부대는 신병ㆍ훈련병이라는 고려를 받아들여 영천 방어선 측방의 예비진지로 배치되었다. 최전방에는 정예1사단과 미군 2개 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날 밤부터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국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결정짓는 전투를 앞에 둔 아군의 사기는 적개심으로 가득 차 충만 해 있었다.
박격포탄이 우리 예비 진지에도 무수히 떨어지고 최전방에서 피아간에 쏘아대는 총소리가 바로 옆에서 쏘는 소리 같이 요란하다. 이따금씩 하늘에는 눈부신 조명탄이 터지고, 이는 아군이 쏘아 올리는 조명탄이고 야간전투에 취약한 아군의 사기 진작용으로 쏘아 올리는 조명탄이다.
최전방의 아군(1사단과 미군)은 밀고오는 북한군과 야간 진중백병전을 용감하게 치뤘고 영천 교외에 배치된 아군의 군단포는 쉬지 않고 아군 진중포격을 하고 있었다. 적군과 아군은 칠흑 같은 야밤에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머리를 만져 까까머리는 무조건 적군으로 인식하고 단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치는 처절한 백병전 끝에 북한군은 공격을 멈추고 후퇴하였다. 6ㆍ25전쟁 초기에 한바탕 승전으로 기록된 최초의 전투로 영천회전을 꼽는다.
이렇게 하여 이튿날 우리는 다시 훈련소로 복귀하게 되고 날씨가 좋아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공산군은 낙동강 북쪽으로 퇴각했다.
공병훈련소(대대급)에는 미군사고문단(KMAG)요원이 배치되었고 언어가 소통되지 않자 학도병중에 “영어 아는 사람 나오라”는 특무상사의 지시가 있었다.
아무도 “예”하고 나오는 병사는 없었다. “없어?” 하며 특무상사는 호된 단체기합을 가하고 있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양택진 이병이 나왔다.
“나는 영어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인구 이병이 작년 대전에 있는 미국문화원(USIS)에서 개최한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하고 고자질을 했다.
나는 엄살죄로 호된 기합(방망이로 때리는)을 받고는 부대장과 고문관에게 인계되었다.
고문관이 인터뷰를 하는데 미국식 발음에 익숙하지 않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종이와 연필을 주며 글로 질문해 달라는 말을 했다. 고문관은 질문을 글로 써주었다. 그제서야 질문요지를 알 수 있었고 이번에는 영어로 대답해 주었다. 몇 마디 질문이 끝나자 고문관은 “아주 훌륭한 영어를 한다. 비록 히어링(Hearing)은 모자라지만 문법이 정확한 영어실력이다”라고 부대장에게 말했다. 그 말도 내가 통역을 했다.
그날부로 나는 고된 훈련을 면하고 부대장과 고문관을 따라다니며 통역병 역할을 했다.
13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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