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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 철책 |
부대장 입회하에 하늘과 같은 선임 장교들을 모아놓고 이 매뉴얼 교육(교관의 교관)을 해 주었다.
그 후 나는 존경받는 이등병이 되고 있었다.
1950년 9월 초에 301공병교육 대대장에게 육군본부에서 특별 작전명령이 내려왔다.
현지에서 공병장교후보생 500명을 모집하여 2개월 후에는 육군 소위로 임관시키라는 명령이다.
이것이 6ㆍ25 이후 최초의 단기사관 양성과정이고 공병 5기생이다. 나는 이 교과목 계획서를 작성하는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육군본부 내에서는 훈련받은 통역장교 2명이 배속되어 왔다. 나의 통역병 용도는 없어졌다.
부대장과 고문관은 나를 이 과정에 넣어서 장교로 임관시키는데 합의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군대는 명령대로 복종해야 한다. 2개월간의 훈련내용은 나에게는 복습과정과 같았다. 전반기 시험에 나는 단연 1등을 하였다. 졸업(임관) 1주일을 앞두고 졸업시험을 치렀다. 나에게는 무서운 악몽의 운이 싹트고 있었다. 동기생 중 같은 나이의 동료가 있었는데 제대로 하면 낙제생감이다. 그는 나에게 시험이 자신 없으니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내 옆에만 앉아라. 내가 속성으로 답안지를 쓰고 한 장 더 써놓고 나갈 테니 너는 그것을 내면 된다.”
나는 약속대로 했으며 동기생 중에 가장 먼저 답안지를 내고 나갔다. 내가 떨어뜨리고 온 답안지 1부를 집어 들고 그 사람이 답안지를 제출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구대장(소위)이 이를 잡아 문제 삼고 나와 그는 지하 움막에 설치한 영창에 들어갔다. 사정위원회는 나는 졸업(임관)시키고 그 사람은 퇴교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사필귀정! 둘은 함께 퇴교처리 됐다.
윤두훈 대위(당시 중대장)는 나를 불러 “아쉽다. 너는 오늘부터 퇴교한다”며 귀향증을 주었다.
“중대장님! 장교가 못 되고 퇴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귀향증은 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학도병으로 지원한 사람입니다. 다시 이등병으로 돌아가 싸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50명을 이끌고 학도병으로 지원한 대표입니다. 그들은 지금 전방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나더러 그들의 배신자가 되라고 하십니까?”
“그 기상과 정신이 좋다. 부대장께 너의 소원을 간청해 주겠다.” 나는 중대장을 따라 부대장(서윤택 대령)에게 갔다. 설명은 윤두훈 대위가 모두 해주었다.
“좋아, 자네의 뜻을 받아 주겠다. 그 대신 자네는 장교의 소질을 모두 갖추고 있는 병사다. 내가 특권으로 요청해서 2등 중사로 진급시켜 주마.”
그 뜻이 받아들여져 2등 중사(군번 0358522)가 되었고 계속 그 부대에 배속 받게 되었다.
공병 5기생은 9ㆍ28 수복 1주일 후에 빛나는 소위계급장을 달고 소대장으로 일선에 배치됐다. 그리고 38선을 넘어 압록강, 두만강까지 수복하게 된다.
301공병 교육대대는 공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부대장과 고문관은 그대로 진급하여 배치돼 왔고 해를 바꾼 1951년 1월에 고문관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나는 동래에 있는 전시 단기사관생 훈련소에 입교하여 그해 3월 3일 운명이 바뀐 육군 소위에 임관하게 되었다. 당시 만 18세의 미성년 장교로서 성년을 인정받는 특별전형을 받고 말이다.
공병학교에서 소위로 임관된 나는 나의 희망과는 달리 공병학교 교관으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폭파, 지뢰, 장벽, 위장술, 연결방법 등 교관으로 일했다. 이 때 미국공병학교에서도 하지 못한 미제 각종지뢰를 절단하여 교육 자료로 만들었으며 뇌관을 절단하다가 윤두훈 대위는 크게 부상을 입고 입원하였다.
나는 그 뜻(한)을 이루기로 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하여 성공시켰다. 고문관들은 역사적인 성공을 축하하면서 한편 만용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 작품은 오늘도 공병학교에 보존되어 있다.
▲ 이인구 회장의 미국 공병학교 유학시절 |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어 기어오는 중공군은 막대기 자루에 달린 수류탄 한 발만 갖고 우리 진지에 들어와 던진다. 막아도 막아도 끝이 없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5개론들이 깡통과 50개론들이 드럼통을 이용, 네이팜 지뢰를 만들어 진지 앞에 매설하고 인해공격을 해오면 폭발시키는 방법이다.
몇 차례의 실험 끝에 개발한 네이팜 지뢰의 시범이 있었다. 육군본부, KMAG 등 상부 사령부에서 참관한 이 시범은 대단한 성공으로 인정되어서 곧바로 네이팜 지뢰의 제작요령, 사용방법, 전술적 효과에 대하여 일선 부대에 순회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실전에서의 그 위력은 훨씬 대단했다.
1980년대 중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중국정부요원 200명이 한국의 근대화 운동과 새마을 교육을 받기 위하여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에 특별과정이 개설된 일이 있다. 나는 그때 대전 상공회의소 회장과 충남새마을 본부 부본부장을 맡고 있었고 2 시간의 특강을 맡은 일이 있다. 내 강연 모두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 중국요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로 인해 2시간의 앙코르 특강을 요청받은 일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서니 역사의 변천에 대하여 금석지감이 교체하는 감동을 하게 됩니다.
나는 30년 전에 장교로 중공군과 싸웠습니다. 인해전술을 극복하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중공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네이팜 지뢰를 개발 보급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중공군을 가장 많이 살상한 한국 군인의 한사람이기도 합니다. 전쟁은 끝나고 우리나라는 전후복구와 조국 근대화 작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부가 이를 해냈고 나는 그 운동의 선봉에 서서 일한 사람입니다.
나는 학술적인 원리를 여러분께 강의할 입장에 서있지는 못하지만 노도같이 달리면서 개척한 조국 근대화 운동의 실체와 경험담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하여 여러분께 강의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가지고 가서 천하대국 중국을 현대화 시키는데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중국정부의 엘리트임을 자칭하고 등소평의 지시에 따라 우리의 근대화 정책교훈을 받아갈 인물들에게는 흥미진진한 말이고 숱한 질문과 가감 없는 경험담이 진지하게 오갔다. 그래서 2시간의 앙코르 강연을 요청받게 되고 교과목이 없는 토요일을 택하여 추가 강연을 해주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 공병소위 활동 모습 |
공병학교 교장실로 오라는 지시를 받고 가니까 교장과 수석고문이 같이 있었다.
“왜 귀관은 도미유학 신청을 하지 않았는가?”
“일개 소위가 고등군사반에 가겠다고 할 수 없어서입니다.”
“아니다. 자네는 꼭 교육을 받고 와서 해야 할 임무가 있다. 지금 당장 신청서를 여기서 쓰라!” 했다.
나는 50명 중 단 1명의 소위로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동급생은 대령 1명, 중령 2명, 소령 10여 명, 나머지는 대위, 중위로 편성되고 소위 한사람이 여기에 끼게 되었다. 6개월의 교육기간이 반이 넘었을 때 학교 중간 성적이 발표되었는데 나는 50명 중 1위였다.
그 때 워싱턴의 주미대사관에서 강영훈 소장(후에 국무총리 역임)의 호출이 있었다.
“나는 미국에 와있는 한국군의 통솔자로서 귀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한다.”
“귀관은 1주일에 4시간씩 미공병학교의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으라. 귀국하면 한국 신병훈련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또 1주일에 2번 이상을 미국방부(펜타곤) 매뉴얼 총국에 출입하여 공병관련 매뉴얼을 입수하고 교육보조영화(해설은 영어)를 한국어로 취입하는 일을 하라. 이 일을 위하여 뉴욕에 있는 황재경 아나운서가 귀관을 돕는다. 또 1주일에 한번 씩 황재경 아나운서를 도와서 모국방송(모국동포에 고함)에 출현하라”는 요지 특별임무 부여를 받았다.
“나의 지시는 한국 육군본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고 미공병학교의 성적평가는 상관하지 말라”는 주의까지 받았다. 학교 교육성적은 나빠도 좋으니 이 지시에 더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라는 지시였다. 나의 졸업성적은 “상중하”정도로 전락되었지만 특별임무는 상중상의 평가를 받았다고 자임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곧바로 공병학교에 배속되고 1인4역의 고달픈 신세가 계속된다. 교수부 교육계획장교로서 신교리교육의 원천계획을 입안 하는 일, 신교재를 작성하여 이를 교육할 선임장교 교관을 상대로 중점을 교육하는 일(교관의 교관), 적당한 교관물색이 힘든 특수과목은 직접 교관을 맡는 일, 진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대학(장군/대령급의 보수교육반) 전임 교관을 하는 일(파견교관), 부산 동아대학에 신토양공학 특설과목을 맡아 파견관 교수로서 일하는 일 등이다.
▲ 6ㆍ25전쟁 참전 병사들 모습 |
1202 건설공병단 작전참모와 1군 사령부 작전계장을 하는 동안 나는 전후복구와 국도포장사업을 전담하는 건설기술 장교로 활약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나는 장장 1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계룡건설을 창립하는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던 차에 제대 후 두 달 만에 오산에 있는 미5공군사령관의 간청에 따라 반군반민간인으로서 그분의 일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김신조 일당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침투하는 사건이 있었고 며칠 후에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푸에블로 정찰선 납치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전시체제인 데프콘Ⅱ를 선포하고 본국에서만 비밀무기로 가지고 있던 최신예 전투비행기(팬텀기) 2개 대대가 급거 공중급유를 받으며 한국 군산비행장과 광주비행장에 착륙하였다.
그런데 착륙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대전파)하여 모처럼 온 이 비행기가 이륙이 금지된 상태였다.
5공군사령관(중장)은 8군사령부와 육군본부에 키맨(Key Men)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 키맨은 이인구 중령 한 사람 뿐인데 2개월 전에 전역하였으니 동원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미5공군사령부산하 정보부대(OSI)에 거의 납치상태로 끌려간 나에게 사령관은 “극진히 모셔오라는 지시를 했는데 혹시 큰 실례가 있었던 것 같다” 며 사과하고 “한국방어에 매우 민감한 이 문제를 당신이 해결해 달라”는 사정을 했다.
나는 기꺼이 승낙하고 그 지식이 들어있는 미국 매뉴얼 번호를 알려 그 책을 구해오라고 했는데 10분 가량 후에 도서관에서 원서를 구해왔다.
“Aviation Constraction Engineerig”이라는 제목의 매뉴얼이다.
그 중 Barrier 장치란 소제목의 부분을 찾아내서 “바로 이것이 Key입니다” 했다.
항공모함에서 착륙하는 비행기를 활주로 끝에서 고무줄로 붙드는 장치를 말한다.
“이 책에 있는 10가지 부속품은 미국 군수목록에 시리얼 넘버로 등록된 보급품입니다. 이것을 한국에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긴급 공수를 요청하면 10일 이내에 한국에 공수해 올 수 있습니다. 그 것만 얻게 되면 나머지는 한국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속이 도착하면 몇 일이면 설치가 가능합니까?”
“1~2주일이면 족합니다.”
그래서 나는 미5공군의 문관 자격과 한국 건설업자 자격으로 이 긴급공사와 또 몇 가지 문제를 해결키 위하여 5공군사 휘하에서 마지막 국방 봉사를 한 바 있다.
▲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철모. |
그러나 그들은 늑대와 목동의 이솝이야기처럼 엄포에 그치고 실행은 하지 못하고 있다. 주한 미군과 한미연합작전통제가 무서워 떨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아무리 우세한 병력과 신형 파괴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의 남침 계획이 노출되면 우리가 먼저 북한의 파괴무기 진지를 초토화 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이 미국과 맞붙는 것을 꺼려하고 북한의 도전을 극렬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초에 3대 세습에 성공한 애송이 김정은이 북한 조평통위원회에 보낸 남조선 공략지령 1호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남한 모든 종북단체와 북한에서 침투한 조직은 총력을 다하여 대남 공작에 집중하라”는 지령이고 남한 내 있는 모든 조직원은 총선과 대선을 앞둔 한국의 혼란을 조장하고 자기 편에 서있는 후보들을 대거 국회의원와 대통령에 당선시켜서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을 접수하게 하라는 내용이며 특히 대한민국과 미국의 사이를 이간시켜 미국이 남한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라는 내용이다.
한ㆍ미 FTA반대, 주한미군 철수, 국가 보안법 폐지, 제주도 군항과 한미연합사령부 공사 방해 등 행동목표가 나열돼 있다 한다. 낯뜨거운 일이고 코웃음이 나오는 유치한 장난들이다.
미국과 참전 16개국을 포함한 서방세계는 일제히 칼을 갈기 시작했다. 한미 2+2 장관은 워싱턴에서 더 긴밀하고 한 점 허점이 없는 대비태세를 공개적으로 약속 선포하고 있다.
한국 국민의 대다수는 북한의 잔꾀에 적개심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북한은 손해 볼 일만 찾아서 하고 있다.”
“올 테면 오라. 해볼 테면 해보자”는 안보의식이 치솟고 있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북한을 조국으로 삼고 있는 상당수의 미친 종북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안에 숨 쉬고 있는 한은 안심하고 넘어갈 일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6ㆍ25전쟁 62주년을 맞아 우리는 새로운 대오각성의 시기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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