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병조 금강대 총장 |
그 깨달음을 향한 여러 노력 가운데 선수행이 있다. 중국의 선종은 교종에 비해 볼 때 후발 주자였다. 다시 말해서 이미 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룬 교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종파였다. 그들의 교종에 대한 차별화 전략은 다각도로 시행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념적 차별성이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의 궁극적 경지는 언설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어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의 수단이다. 그러나 말은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물맛을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다. 다만 마셔보면 그 맛을 알 뿐이다. 교(敎)는 부처님 말씀, 선은 부처님 마음이라는 선종의 주장 또한 교종에 대한 차별화 전략이다. 저 멀리 앞서 가는 교종을 따라 잡으려면 보다 혁명적 선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화두라는 용어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다. 글자로는 '언어의 머리'라고 썼지만, 사실은 언어의 궁극, 언설을 초월한다는 상징적 의미다. 이처럼 화두는 '절실한 의문'을 품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無)'자 화두다. 대부분의 화두는 딜레마로 제시된다. 논리적으로는 납득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도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의 극한을 넘어서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트이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모(本來面貌)' 같은 철학적 성찰도 있기는 하다. '부모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대는 어디 있었는가?' 억장이 무너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우리는 나의 출생을 부모, 거슬러 올라가서 조부모, 증조부모 등의 수직적 사고로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끝까지 올라갔을 때, 그 최초의 '그 무엇'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다. 존재의 궁극에 대한 성찰은 결코 수직적 단순논리로써 해명될 수 없다. 따라서 이 화두 속에는 수평 사고로의 전환이라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화두와 더불어 선사들이 즐겨쓰는 방편의 하나가 '할(喝)'이라는 고함소리다. 원래 이 '할'이라는 중국말은 '목마르다'는 뜻이다. 즉 타는 목을 적시기 위한 절실한 외침을 깨달음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요즘 세간에는 불교용어가 무슨 유행처럼 범람한다. '새해의 화두'니 '정치적 화두'니 하는 표현들이다. 물론 전문적 불교용어가 일반화되어서 긍정적인 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심오한 용어를 단순화시켜서 무슨 문젯거리나, 해결해야 할 일 정도로 가볍게 쓰는 것은 문제다.
요즘 사람들은 별다른 고뇌의 흔적 없이도 어려운 말을 너무 쉽게 써 버린다. 불교의 용어가 보편화만을 추구하다가 엉터리로 둔갑한 예는 부지기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의 길이 끊겼다'는 선가의 멋있는 표현이다. 언어가 끊어졌으면 이제 마음의 길만이 실낱같은 희망이다. 이 말을 우리는 지금 '말도 안 된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이쯤되면 정말 '언어도단'이다. 공염불(空念佛)이라는 수행태도는 공(空)을 닦는 수행이다. 삼라만상이 영원하지 못하고, 나 또한 그러하며, 또 공이라는 생각 또한 공일 따름이다. 이 말을 '헛일'이라는 의미로 쓴다. 장로(長老)는 불교계의 큰 어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개신교에서 그 말을 원로 교인이라는 뜻으로 쓴다. 불교용어의 인플레 현상이 자칫 불교의 형질(形質)까지 변형시켜버리는 것은 아닌지 적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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