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철성 건양대 군사경찰대학장 |
1906년 윤치호가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전신으로 하고, 1922년 신교육령에 의해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 송도고보)로 개명한 학교에 다닌 어떤 사람의 증명서 내용의 일부다.
'오른쪽 사람은 재학 당시 학업성적이 우수했으며, 우등생으로 졸업 후 연희대학교 이공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음' 성적증명서 불첨부 이유서.
당시 학제에 의해 6년 졸업 사실은 인정되나 학업 성적을 증명할 길이 없었으므로 발행한 것이다. 발행일은 1958년 10월 17일. 6ㆍ25 종전이 있은 뒤 5년을 넘긴 시점이다. 전쟁과 함께 학업을 중단하고 육군에 입대해 중위로 제대하고, 또 다른 사회 진출을 시도하던 시기에 발급받은 증명서로 판단된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이야기다. 학력 위조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세상에서 고등학교 교장 명의의 '불첨부 이유서'의 효력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인 나 자신도 얼마 전 작고하신 선친이 고이 간직해온 몇 장의 증명서들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으니까 말이다. 6ㆍ25는 많은 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
6월은 역사를 되새기는 달이다. 6일이 현충일이고, 10일은 6ㆍ10민주항쟁 기념일이며, 15일은 6ㆍ15남북공동선언이 있었던 날이다. 정치권에서는 국가관 논쟁으로 진보와 보수 모두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논쟁 속에서 남북통일과 인도적 차원에서의 이산가족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 부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6월의 역사 달력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남북 이산가족을 위한 인도적 노력이다. 분단 이산가족 1세대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6월 16일은 1972년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실무회의에서 '본회담 의제 확정 합의문서'를 교환한 날이다.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주소와 생사를 알아내며 알리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과 친우 사이의 자유로운 방문, 자유로운 상봉, 자유로운 서신 거래를 실현하는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문제 등 5개항이었다. 남북고향 방문단 등 역사적인 상봉이 있었지만, 항상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정치적 물살을 탈 수밖에 없었다.
6월 16일은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와 함께 방북한 날이기도 하다.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남북관계를 민간교류차원에서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중 3항.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한다는 조항은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이슈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 2010년까지 남북 이산가족은 생사확인, 서신교환, 남쪽 방문상봉 등 모두 1만2272건에 연인원 7만5326명이 서로 교류 상봉했다. 생사 확인 형태가 가장 많았고, 방북상봉이 그다음을 이룬다. 연도별로 보면 2007년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2008년부터 급격히 축소됐다. 남북문제는 냉혹한 국제정치와 미묘한 남과 북의 국내 정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꽃게잡이 철에 일어난 두 차례의 연평해전도 6월에 일어났다. 2002년 2차 연평해전에서 아까운 젊은이들이 산화한 날이 6월 29일이다. 그들에 대한 추모도 올해 10주년을 맞이한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 간의 이념적 갈등이 더 깊어지기 전에 남북 이산가족의 문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정리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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