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원 국립대전현충원장 |
“우린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해”라고 했던 동생 진석. 세상에 하나뿐인 동생을 살려 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형 진태는 “난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뜨면 바로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어”라며 극한의 두려움을 표출한다.
자욱한 포연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죽음의 고비를 넘는 진한 형제애를 느낄 수 있던 영화였다.
얼마 전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더 감동적인 실화가 펼쳐졌다. 4월 23일 오후 부산 UN기념공원에서 캐나다의 6ㆍ25 참전용사 허시 형제 합동안장식이 열렸다. 전장에서 잃은 형을 평생 그리워하던 아치발드 허시의 생전 마지막 유언 '삶의 마지막 순간, 한국에 있는 형 옆에 함께 눕고 싶습니다'에 따라 자신이 전투를 치렀던 머나먼 이국땅으로 돌아왔다.
아치발드 허시 이병은 21살 되던 1950년 9월 7일 6ㆍ25전쟁 참전을 위해 입대했다. 동생이 걱정된 형 조지프 허시는 당시 22살이었는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동생 몰래 1951년 1월 6일 동생이 있던 캐나다 제2보병대대에 자원입대했다. 같은 연대에 소속됐지만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1951년 10월 13일 생애 마지막 순간에 만난다. 동생 허시 이병은 북한군과 전투를 벌인 후 참호 정비를 하다가 전우들이 같은 이름을 가진 허시 병사가 적군의 총에 맞아 쓰러져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우들이 말한 장소로 가보니 고향에 있어야 할 형이 총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동생을 보호하려고 참전한 형은 마지막 순간에 그리워하던 동생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그해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동생은 홀로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에는 형의 유품인 잠옷이 들려있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유품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러나 대전현충원에는 허시 형제보다,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더 애잔한 실화가 있다. 6ㆍ25전쟁 발발시, 같은 날 입대하고, 같은 부대에 배치된 뒤 같은 전투에 참여해 한 날 한 시에 전사했으며, 같은 날 유해가 발굴돼 같은 날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이제는 '흙이 되어버린 형제' 전사자가 있다. 2001년 5월 21일 전남 화순군 화순읍 국군 가매장지에서 6ㆍ25전쟁 전사자 유해 26구가 발굴됐다.
그 가운데 유석오 일병과 유석환 일병의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형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형제는 1950년 12월 31일 군에 입대해 같은 연대에 배치 받았다.
유가족은 “석환이는 당시 군에 갈 나이가 아닌데 징집됐다”며 “형을 의지하고 따라 다니다가 같은 부대에 배치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형제는 1951년 2월 중공군의 대공세 때 강원 횡성지구 전투에 참전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4월 4일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나란히 파견된다. 하지만 형제는 입대 후 4개월 만에 이 전투에서 못다 핀 꽃송이를 접는다.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었던 한 떨기 형제애의 꽃은 지금 푸르른 잔디 위에 나란히 묘비로 피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여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폐허의 땅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강국을 이루며 세계 경제 대국으로 우뚝 솟아 있다. 세계가 놀랄만한 발전을 이룰 수 있던 이유는 이 땅에 세계 각국의 용사들이 목숨을 바치며 자유와 평화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 UN기념공원에 잠들어 계신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강력한 국력과 자애로운 마음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해 더욱더 빛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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