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중학생이 또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야 말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동급생들의 지속적인 괴롭힘과 폭행이 어린 학생을 사지로 몰았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기사에서 말하는 자살의 원인이라는 것이 영 미덥지 않았다.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을 텐데 그를 무시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사건을 몰아가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동급생들이 같은 반 친구인 그 학생에게 폭행을, 그것도 지속적으로 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기사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한 생명이 스러졌고 그것은 다른 이의 괴롭힘 때문이다'라는 식의 논리 전개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어설픈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 사건의 방관자이자 가해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학생이라는 페르소나를 견고하게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어린 학생들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실상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억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중요한 일에도, 그렇지 않은 일에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완벽함에 매몰시킨다. 그리고 그 허울 좋은 완벽주의는 어린 학생들에게조차도 가차 없이 적용된다. 학생의 페르소나를 완벽히 수행해 낸, 이를테면, '공부 잘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등으로 수식되는 학생은 좋은 학생과 착한 학생이 되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비행청소년과 골칫덩이로 전락해버린다. 학생의 페르소나를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것이 '착한'이라는 수식어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페르소나를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는가. 나는 한 장의 기사를 읽으며 수없이 많은 질문을 허공에다 던졌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구름이 가득해 달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은 질문이었고, 나 스스로도 그 의문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만큼 나이를 먹었고 강하게 갈구했던 질문들은 가슴 한 구석에 묻혀버렸다. 소리를 잃어버린 태고의 유물을 발견하듯 나는 오랜만에 다시 그 질문과 마주했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누군가의 선생으로 살아왔다.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곁엔 무수한 가면만이 남았다. 가면을 쓰는 주체인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가난하고 외로운 밤을 맞는다. 하지만 우리의 다음 세대는, 미래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뜨겁게 던지고, 스스로 틀린 답이든 맞는 답이든 답해보고, 또 그 답이 아닌 것 같으면 고쳐서 다시 새기는 그런 시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너는 학생이니 이렇게 해야 해” 라는 말. 가만히 생각해보면 너무 잔인하고 삭막한 말이 아닌가. 이 땅의 그 누구도 학생으로 태어난 자는 없다. 그러니 학생이라는 페르소나를 강제하는 것은 아이의 무수한 가능성을 절제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이 땅의 학생들이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은 채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스러져가고 있다. 학생다움을 강조하는 어른들을 향해서는 입을 닫고 외로운 길을 행군하듯 걷고 있다. 그러다 숨 쉬기 힘들어지면 난간 밖으로 자신을 탈주시킨다. 어느 철학자는 자신이 제도화 되는 것이 싫어 예순 생일에 아파트난간 밖으로 몸을 날렸다고 한다.
아무것도 강제하지 말자. 페르소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연금술사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우리 내부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아를 찾아나서야 한다. 어린 그들이 자신의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를 뜯어내는 것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주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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