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순택 논설위원 |
새 출발하는 19대 국회는 문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국회법대로라면 어제 열어야 했지만 '힘 있는' 상임위원장 자리다툼에 개원이 무산됐다. 언제 열릴지도 알 수 없다. 이런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싸늘하다. 2000억 원에 육박하는 세금으로 호화판 의원회관을 지어놓고 국회를 공전시키는 추태는 도대체 무슨 배짱인가. 지난 총선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수없이 약속했던 '환골탈태'는 온데간데없다.
'식물국회'라니. 언감생심이다. 눈을 돌려 텃밭을 보라. 지금 감자꽃이 한창이다. 하얀 꽃이 피어 은은한 향이 흐른다. 이처럼 식물은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 맺을 채비를 한다.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한다. 하는 일 없이 세금만 축내는 국회가 감히 식물에 빗대다니, 식물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늑장 개원'은 이번만이 아니다. 4년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여의도 고유의 풍토병이다. 새로운 국회가 열릴 때마다 '정치 실종'이란 뼈아픈 공백을 되풀이해왔다. 정말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법에 국회의장단 선출과 개원식은 의원 임기 개시 후 7일에 하고 상임위원장단은 그 후 3일 이내에 선출하도록 명문화한 것은 14대 국회다. 14대 국회는 문을 열기까지 125일을 허비한 최장 늑장 국회다. 비난이 빗발치자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부랴부랴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처음 적용된 15대 국회부터 무시됐다. 공전을 거듭하다 7월에야 원구성을 마쳤으며, 16대, 17대는 임기 개시 후 17일, 28일이나 지연됐다. 18대 국회는 89일이나 늦게 문을 열었다.
지각 개원했으면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열심히 일을 해 이를 만회하려는 게 사람의 성정이다. 그러나 국회는 그러지도 않았다. 개원이 늦어질수록 외려 성적이 떨어졌다. 국회의 일은 법을 만드는 것이다.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통과된 법안의 비율인 가결률은 16대 38%에서 17대 26%로, 18대에선 17%까지 뚝뚝 떨어졌다.
만약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라면 19대 국회가 어찌될지 앞날이 빤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역사가 되풀이되는 게 아니라면 우리 국회가 과거에서 '나쁜 것만 재빨리 배우'고 있음이다. 이런 국회를 4년 동안 봐야 하게 생겼으니 또한 답답하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이런 현실을 19대 국회는 고칠 줄 알았다. 그렇게 기대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우선 입법을 추진할 민생법안 12개를 확정했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맞춤형 복지 관련법이 포함돼있다. 민주통합당도 7대 민생의제 관련 20개 법안을 당론으로 정했다. 반값등록금, 무상보육 및 급식, 금융소비자 보호 관련법 등이다. 국민은 국회가 민생을 최우선 해결과제로 삼는다는데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국회의원에게 주어진 '염치없는' 특권을 내려놓겠다는 말에도 관심이 갔다.
지난달 선거에서 승리한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과 각료의 연봉을 30% 깎은 것이었다. 이즈음 일본의 국회의원들은 연봉의 14%가량 되는 세비 300만 엔씩을 삭감하기로 했다. 이를 보고 느낀 게 있어 우리 국회도 염치를 보이는구나 싶었다. 프랑스의 각료나 일본의 의원들이 그렇게 절약한 돈을 합쳐야 얼마나 될 것이며, 보수를 삭감한다고 해도 그들은 고액 연봉자일 것이다. 그래도 국민의 고통을 강 건너 불처럼 보지 않겠다는 뜻만큼은 보여준 것이다.
우리 국회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니 싶었다. 무엇보다 '월 120만 원 종신 연금'은 포기해야 마땅하다. 누가 봐도 국민을 위한 봉사에 필요한 특권이 아니다.
민생법안이든 특권을 내려놓든 국회 문을 열어야 논의도 하고 처리도 할 것 아닌가. 진정 민생을 생각한다면 당장 문을 열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꽁꽁 문을 닫아 놓고는 '상생국회'니 '민생국회'니 떠드는 입이 부끄럽지 않은가. 호국영령을 기리는 오늘, 현충일에 값하지 못하는 '민의의 전당', 국민의 분노를 사는 '죽은 국회', 그 존재의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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