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효순 미술평론가 |
8월의 아주 더운 날 병상에서 세상을 떠나가신 선생님은 천상 타고난 미술인이요, 흙 사람이었다. 후학들의 전시장을 늘 돌아보시면서도 조용히 다녀가시는 배려는 선생님의 타고난 성품을 말해준다.
오늘 대전지역에서 활동하는 미술인 중에는 이종수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할 만큼 선생님은 매사에 사려깊고 마음이 남달라 적이 없는 분이었다.
이 지역과 인연을 맺어 뜻을 기리는 화가들은 많이 있지만, 대전에서 나고 자라 뼈를 묻은 화가들 중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박승무 화백이나 이동훈 화백은 대전에 연고를 두었으나 대전토박이는 아니었고 이응노 화백은 더욱 연고가 약한 화가였다.
이종수 선생의 변함없고 우직하신 성품은 국전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종수 선생은 11회 국전에 최초 출품하여 3점이 입선 한 이후, 17차례에 걸쳐 연속 입선을 하셨다.
동료들이 큰상을 받을 때도 연연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본인의 길을 걸어 온 그 모습에서 진정한 예술인의 자세를 본다. 오늘날 작가들에게 시사점을 던지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화여대 도예과가 처음 생기는 시점에 서울로 올라가 2년여 기간을 재직하는 도중, 작업을 하겠다고 사표를 던지고 대전으로 내려온 것은 오직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일관한 선생님의 철학을 말해 준다.
그렇게 내려오신 후, 전통가마를 지키며 끝까지 작품에만 몰두하셨고 조선의 백자가 선생님의 손을 통해 진화되고 다시 태어났다. 날씨와 불(火)과의 요변에 태어나는 도자기는 한차례 가마를 구워내도 건질 수 있는 작품이 하나, 둘에 그칠 때도 있어 선생의 손에 조각조각 파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갑천변의 개발에 밀려 금산의 추부에 '수졸재'를 짓고 사셨던 선생님은 시심(詩心)도 깊어 작업 도중 좋은 글도 남기셨다. 시인 박용래와의 친분도 회자되는 이야기다.
갑자기 발병한 질병으로 인해 몇 개월만에 마지막 전시를 마치고 떠나신 선생님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듯 해마다 쓸쓸한 기일을 맞고 계신다.
필자는 3년 동안 선생님의 묘소를 찾았지만 선생님의 가족들만이 함께 한 자리였다.
정치논리에 발 빠른 사람이거나 제자들을 많이 배출한 화가들은 생전에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선생처럼 묵묵히 한길로 걸어 온 미술인은 기억에서 멀어지게 마련인 것이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선생님은 생전에 이응노미술관을 참 맘에 들어하시고 부러워 하셨다. 당시는 선생님의 미술관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을 때라 생각을 많이 하신 듯하다. 그 일은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묻혀버렸고, 마지막으로 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겨울열매'전의 작품들도 아직 자리를 못 찾고 시립미술관에 임시 보관되어 있는 실정이다.
8월 6일이면 선생님의 4주기가 돌아온다. 올해는 뜻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추모행사에 동참해보면 어떨까한다.
병상에 누워서도 전시를 생각하시던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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