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세 대전대 법학과 교수 |
한나라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해 야권의 정권심판론을 방어하는 한편, 젊은 피 이준석과 손수조를 내세워 노회하고 부패한 이미지를 희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민주통합당은 압승의 기대에 안주한 끝에 차려진 밥상을 걷어찼다. 민간인사찰 같은 호재는 흐지부지 날리고 김용민 막말파문과 그로 인한 여론악화를 과소평가하는 등, 패착을 거듭한 것이다. 4월13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사퇴했다. 총선패배로 인하여 지도부가 붕괴된 것이지만, 이즈음 전국을 돌며 실시되는 당대표 경선의 흥행 덕분에 화가 복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한편, 군소정당의 몰락은 보기에 딱할 지경이다.
민주통합당과 연대하여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였던 통합진보당의 당내 부정선거 파동은 한국 정치의 막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진보의 종언을 재촉하고 있다. 자유선진당은 겨우 5석을 얻었다. 그나마, 지역구 당선자 2명이 곧 탈당하리라는 소문이 실현되면 지역구에서 선출된 의원은 이인제 위원장 한사람만 남는다. '대전ㆍ충남당'에서 '논산ㆍ계룡ㆍ금산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회창 전 대표는 4년 전 자유선진당을 창당하면서, 1997년 DJP연합을 통해 공동정부를 구성했던 자유민주연합의 '여권판'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충청권 내에서 김종필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당대당 연합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심대평 전 대표를 확실히 끌어안지도 못했다. 충청권을 대변하는 지역정당을 표방하면서도 지역의 민의를 대변하지도 못했고,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 차별되는 정책노선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이즈음 자유선진당의 모습은 자민련의 마지막 6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김종필은 1995년 2월 김영삼이 이끄는 민주계의 퇴진 요구에 반발하여 민자당을 탈당한다. 곧이어 3월에 자민련을 창당하고 6월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3자리를 휩쓸고 강원지사까지 당선시켰다. 나아가 1996년4월 15대 총선에서는 50석이나 획득하는 녹색돌풍을 일으켰다.
자민련과 김종필의 전성기는 1997년이었다. 그 해 11월 DJP후보단일화를 통해 공동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러나 2000년4월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겨우 17석을 얻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2004년 4월의 17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4명만을 당선시켰다. 김종필은 비례대표 1번이었음에도 낙선했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자민련은 2006년 4월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2008년 2월 창당된 자유선진당은 4월에 실시된 18대 총선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해 18석을 얻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2009년 8월 심대평이 이회창 당시 총재를 비난하면서 자유선진당을 탈당하더니,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1명, 기초단체장 13명 배출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다. 대전 충남에서 조차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2011년 9월에는 자유선진당과 국민중심연합의 심대평, 이인제 의원이 연합한 '통합자유선진당'이 출범한다. 4ㆍ11총선에서 각자도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지역구과 비례대표를 합쳐 5석을 얻는 초라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자유선진당은 오늘 실시되는 전당대회에서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인제 체제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유선진당이 2006년의 자민련처럼 소멸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충청권 주민들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과 독립된 정당으로 인정받을만한 정책적 선명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민련과 자유선진당으로 이어진 '지역당 실험'은 종언을 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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