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속적인 갑ㆍ을관계 강요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대표적인 불통의 벽으로 통한다. 갑ㆍ을의 사전적 의미는 계약자들을 단순히 갑과 을로 구분하는 단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갑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자, 을은 낮은 자로 굳어져 버렸다.
이처럼 은밀히 숨겨진 채 명령과 상하의 복종 관계로 존재하는 모습은 민간과 공공 영역 구분없이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간 부문의 대표적 사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 거래에서 나타난다. 대기업이 협력 중소기업을 동반 성장 파트너로 인식하기보다, 우월적 지위를 바탕으로 성장을 옥죄거나 극단적으로는 기술침해와 동일 시장진출로 중소기업 성장을 막는 사례는 셀 수없이 많다.
2010년부터 정부 주도로 상생협력이 동반성장 개념으로 바뀌어 적잖은 개선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중소기업들의 체감지수는 여전히 낮은 편이다.
기업과 소비자간 관계도 구매 과정에서는 소비자가 갑이지만, 환불과 교환 등 판매 후 과정은 기업이 갑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주부교실에 접수된 분쟁을 보면, 특히 아이폰과 도시바 노트북 등 외국계 전자제품 교환 및 환불 문제가 소비자 입장에서 제대로 처리되지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공부문에서는 예산편성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에 굴종(?)해야하는 지방정부, 정부 정책의 갑작스런 변화 후 공권력에 의해 선의의 피해를 보는 국민도 이 같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하반기 예산안 편성시기만 되면, 과도한 접대를 요구하는 중앙 공직자의 관행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게 지방 공직자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이밖에 현대판 노예제로 불리는 유흥주점 사장과 접대부 관계, 조직 내 선·후배,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감독과 선수선발, 문화예술 지원 공공기관과 예술단체 관계 등도 또 다른 갑을관계의 그늘로 자리잡고 있다.
정부기관을 중심으로 한 불공정거래 척결 노력과 감사원의 불합리한 행정 및 공직자 고발 민원 접수, 경제정의실천연합과 주부교실 등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한 활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지만, 약육강식의 사회 틀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많다.
실제로 소위 정부 주도의 동반성장지수 평가만 해도 주요 대기업이 인센티브를 챙기고 있지만, 최근 한정된 조사 및 평가 기간으로 인한 신뢰성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가 점점 줄고 있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대한 투자재원도 증가했다”며 “하지만 혜택본 기업들이 얼마 안되기에 아직 갈 길은 멀다.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를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광진 대전경실련 사무처장은 “더 많은 권력과 물질을 갖기 위해 경쟁을 조장하는 현 사회구조로는 이 같은 벽을 허물기 어렵다”며 “정부가 동반성장을 외치고 있지만, 국책사업 조차도 무한경쟁을 조장하는 아이러니한 구조를 낳고 있다. 상대에 대한 배려 등 시민의식의 근본적 변화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희택 기자 nature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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