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규·대전 둔산초 교장, 국전 서예 초대작가 |
당시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어, 모두가 뜻있는 선비를 존중하고 빈객을 좋아함을 서로 경쟁하였다. 이에 여불위는 진(秦)나라가 강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막대한 사재(私財)를 풀어 빈객 후대하기를, 어느새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 이때 각 제후 밑에는 논객(客)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순경(荀卿) 등은 저서를 내어 학설을 자랑하였다.
여불위도 자기의 빈객들로 하여금 각기 견문한 바를 저술 편집하게 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으로 모으니, 모두 26권 20만 자가 넘었다. 그리고 천지, 만물, 고금에 관한 모든 것이 망라되었다고 자칭하며, 책을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하였다. 여불위는 이 책을 수도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 진열하고, 제후의 나라를 돌아다닌 선비나 빈객을 초대하였다. 그리고는, “여기에 한 글자라도 덧붙이거나 깎을 수 있는 자는 상금으로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여씨춘추의 문장에 손을 대려 했지만 어느 누구도 글자 한 자 조차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상금을 받아갔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절대 권력자의 자기과시 또는 유능한 인재의 확보를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지 '아주 훌륭한 글'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각종 글 중에 노벨문학상에 추천된 글이 최고의 글이라 칭하듯이, 이 사회를 밝혀갈 학문 속에 우리도 일자천금(一字千金)처럼 학력ㆍ인성의 올곧은 융합교육의 선도인 대전ㆍ충남 최고교육이 전국의 모델이 되어 더 높은 교육을 실현하고 있다.
박일규·대전 둔산초 교장, 국전 서예 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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