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배꽃과 카네이션 그리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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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배꽃과 카네이션 그리고 어머니

[직선곡선]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

  • 승인 2012-05-07 14:27
  • 신문게재 2012-05-08 21면
  • 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
▲ 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
▲ 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
꽃은 아름답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번지게 한다. 축하 인사를 건넬 때, 기념하고픈 날에 꽃을 챙기는 건 그 의미를 더하기 위해서다. 그럼 꽃 중에 가장 예쁜 꽃은 뭘까. 인꽃[人花], 바로 사람이다. 부모는 그 인꽃(자식)을 보는 재미로 산다. 부모에겐 세상 어느 꽃도 어린 자식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러나 꽃이기에 귀한 자식에 견줄 만한지도 모른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없을 테니 말이다.

꽃이 싫었다. 정확하게 배꽃이 싫었다. 낮은 산 밑으로 펼쳐진 과수원에 배꽃이 피는 4월이 되면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꽃이 피면 열매를 잘 맺게 해주기 위해 꽃가루의 수정을 도와주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게 열매가 맺으면 한 가지에 가장 좋은 놈만을 듬성듬성 남기는 열매 솎는 작업을 해야 했다. 풀 뽑기, 약 주기…. 소소한 작업은 봄부터 결실을 맺는 가을 한 가운데를 지나 늦가을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넓디넓은 과수원을 잰걸음으로 돌아다니며 하나에서 열까지 일을 도맡아 하던 사람은 엄마였다. 과수원의 한 해 농사가 온전히 엄마의 손에 좌지우지됐다. 그런 까닭에 집은 내게 늘 텅 빈 공간이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엄마 대신 할머니가 나를 맞았다.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던 내게 '배꽃이 피는 건 엄마가 없다'는 의미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하는 꽃을 무덤덤하다 못해 미워하게 만든 이유다.

카네이션도 싫었다. 국민학교(필자는 국민학교 세대다) 시절, 5월이면 미술 시간에 빠트리지 않고 카네이션 만들기 수업을 했다. 빨간 색종이로 꽃을 만들고 철사로 줄기와 잎의 대를 만든 다음 녹색 색종이로 줄기와 잎을 완성했다. 생화(生花) 대신 조잡스런 솜씨로 만든 카네이션이지만 행여 망가지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갔다. 조막만한 손으로 온갖 정성을 들인 작품이었다. 어버이날 아침까지 만지고 또 매만져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리곤 한껏 뿌듯해하곤 했다. 하지만 꽃이 엄마 가슴에 달려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 달력 옆 벽에 카네이션을 달아둔 엄마는 과수원으로 나가기 바빴다. 홈드레스에 꽃을 달고 집안에 있는 친구들의 엄마를 볼 때마다 벽에 걸려있는 카네이션이 미웠다.

벚꽃이 한창이던 지난 4월, 꽃구경 가고 싶어 난리를 치던 내게 한 후배가 “벚꽃보다 더 예쁜 배꽃을 곁에 두고 가긴 어딜 가냐”며 핀잔했다. 순간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마도 엄마가 과수원 일에서 손을 떼던 해부터였던 것 같다. 그토록 싫어하던 배꽃을 내가 무덤덤하게 바라보게 된 것이. 배꽃이 흐드러진 날에도 이제 엄마는 그냥 먼발치에서 과수원을 바라보기만 하신다. 가지마다 열매가 빼곡히 달려도 그저 바라볼 뿐이다. 자식만큼이나 애틋하게 보듬고 가꾸느라 엄마의 머리가 배꽃처럼 하얗게 셌다. 엄마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붉은 카네이션 한 송이 달아 드려야겠다.

김은주ㆍ자료조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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