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1991년 4월29일. 일본 지바현 마쿠하리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 코리아의 낭자군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선 날.
남과 북이 손잡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중국 탁구의 아성을 무너뜨렸기에 감격은 더 컸다. 유순복과 현정화가 1, 2단식을 따냈을 때만 해도 '이제 이겼다' 싶었다. 그러나 믿었던 현정화-리분희 복식조와 현정화가 4단식을 내주면서 게임스코어는 2-2, 원점. 불운한 기운이 짓누르던 마지막 5단식. 유순복의 눈부신 활약이 시작됐다. 번개 같은 속공으로 중국의 가오준을 몰아붙이며 팀코리아를 정상으로 끌어올린 그는 이날의 히로인이었다.
특히 유순복이 13-17로 끌려가던 경기를 가오준에게 단 2점만을 내주며 21-19로 뒤집은 2세트는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이날 우승은 1973년 사라예보 승전보 이후 19년만의 일. 단가인 '아리랑'이 연주되는 순간, 시상대위의 선수들도 응원단도, 이를 지켜보던 국민들도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영화 '코리아'는 그날의 감동을 스크린에 그린다. 당시의 일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빤하게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할 거라는 짐작도 맞다. 그래도 진부하다거나 유치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남과 북의 선수들이 만나 이룬 46일 동안의 '작은 통일'이 주는 감동은 결코 만만치 않다.
예상 가능한 스포츠 영화의 기본 수순을 충실히 따라간다. 박철민 김응수 오정세 등 조연진들이 웃음을 맡고, 남한 처녀와 북한 총각의 풋풋한 연애담이 있으며, 남과 북의 상징인 현정화(하지원)와 리분희(배두나)는 날을 세운다.
한 팀으로 묶이기 전까지 서로에게 '적'이었기에 융합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남북한 선수들이 부딪히고 깨지면서 팀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제법 뭉클하다. 탁구공의 빠른 움직임과 특유의 소리로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연출도 영민하다. 무엇보다 물씬한 땀 냄새에 숨소리 연기까지 보여주는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매사 똑 부러지는 현정화와 도도하고 묵묵한 리분희는 하지원과 배두나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 오른손잡이인 배두나는 리분희가 왼손잡이라는 점을 감안해 왼손으로 탁구를 치는 노력으로 리분희를 멋지게 소화해냈고, 유순복 역을 맡은 한예리는 독립영화계에서 인정받은 실력자다운 면모를 발휘하며 보석처럼 반짝인다.
감정 과잉으로 '오그라드는' 대목도 없지 않지만, 제대로 긴장과 재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관심도 없었는데 영화를 통해 통일을 꿈꾸게 됐다”는 하지원의 말마따나 통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엔딩 부분에서 현정화가 리분희에게 전하는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편지할 게'도 안 되고, '전화할 게'도 안 되고”하는 대사는 분단의 아픔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탁구라는 스포츠를 다룬 영화로서 수준급의 성취를 뽑아냈다. 결승전 장면은 감격스럽고 남북한 선수들이 헤어지는 장면은 가슴을 저민다.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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