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팀장 |
흑백의 화면에 배경음악도 없는 영화는 평화로운 마을의 그 이면에 폭력과 위선이 자행되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체벌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설교하며 아이들의 신체에 하얀 리본을 묶어주는 목사, 옆집 산파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친딸을 성폭행하는 의사, 아내와 아이들의 희생을 묵인하고 소작농의 아내마저 죽게 만든 남작. 자신들은 온갖 위선과 폭력을 일삼으면서 정작 아이들에겐 순수함과 천진함을 강요한다.
하얀 리본이 묶여진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당한 고통을 증오와 분노로써 어른들에게 분출한다. 또 아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억압을 자신들보다 더한 약자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어른들의 위선과 폭력성을 그대로 답습한 아이들에게 집단적 광기가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는 폭력의 악순환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관객에게 묻는다.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욕구불만을 배출할 정당한 출구를 찾지 못한 사회의 집단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대체용 희생물을 찾는다고 한다. 욕망을 유발시킨 대상을 정복하고 쟁취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폭력은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대체한다고 한다. 이것이 곧 '폭력의 집단전이'라는 것이다. 아이들 역시 어른의 세계를 복사함으로써 어른의 세계가 난공불락의 성으로 차단된 세계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와 혼탁한 악수를 함으로써 어른의 세계가 지닌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다.
몇 년전 대구 초등학교에서 성폭력 사건이 벌어져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일이 있지 않은가.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들의 잔혹함에 어른들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위계에 의해서 고학년이 저학년에게, 저학년은 더 저학년에게 피라미드 형식으로 확대돼 저학년 어린이들을 성폭행한…. 일상적인 폭력에 성폭력까지 가미된 진전된 형태의 학교폭력이었다. 학교폭력이 만연하는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쟁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지식을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지를 놓고 아이들은 입시경쟁이라는 소모적인 경쟁을 한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방법으로 학교는 폭력, 왕따, 자살로 얼룩진다.
등수와 대학입시에 목숨걸게 하는 교육 시스템은 초등학교 시기부터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주입시킨다. 물신숭배와 1등을 원하는 부모세계에 설득당하는 아이만이 강한 어린이가 된다. 어른의 세계를 눈치 빠르게 간파한 약삭빠른 아이는 어른의 세계에 종속되면서 빨리 '철든' 무서운 동심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리고 유서를 써놓는 아이들은 계속된다.
보문산 아래 대사동 산동네는 고만고만한 오래된 주택들, 조그만 마당에 펼쳐놓은 화분들, 뱀처럼 집을 감싸고 도는 투박한 계단들 그리고 올망졸망한 계단식 텃밭들이 자리잡고 있다. 텃밭엔 나이든 주인들이 밭고랑을 만들기도 하고 씨를 뿌리며 하루를 보낸다. 그들은 가을까지 자라나는 농작물을 가꾼다. 특별히 화학비료 같은 걸 많이 주는 것 같진 않다. 그저 햇살과 바람과 비와 더불어 가만히 지켜보며 북돋아 주기만 한다. 아이들도 남을 밟고 살아남아야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것, 부모와의 스킨십과 정서적인 유대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오에 겐자부로는 뇌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과의 공생은 자신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됐다고 고백했다. '부서지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깨닫게 하는 아들 히카리는 연달아 일어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회복하는 인간'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어려움에 맞섬으로써 히카리는 물론 오에 부부도 함께 이전보다 확실히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인간에 대해 '회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오에 겐자부로의 그런 방식을 우리도 학습할 수 있을까. 내일은 어린이날.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드의 시구를 지금 자랑스럽게 읊을 수 없는 까닭을 어른들은 내일 하루만이라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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