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재권 한국은행 대전충남본부장 |
업무상 외국은행 직원들을 만나다 보면 상당히 젊은 30~40대인데, 국내 은행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전무 상무 같은 거창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평생 근무해도 임원 되기가 쉽지 않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한마디로 부러웠다. 외국은행에서 유난히 임원비중이 높은 것은 영업상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사업부문별로 직원 수는 10명도 채 안 되는 곳이 많은데, 이중 2~3명이 임원 직급을 달아줘야 대외활동이 원활하게 할 수 있단다. 전형적인 '직급인플레' 현상이다.
이와 같은 직급인플레 현상이 전세계적인 현상인가 보다. 최근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는 일부 기업들이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직원들을 '첫인상관리 이사(Director of First Impression)'라고 부르거나, 검표원을 '최고매출보호책임자(Chief Revenue Protection Officer)'라고 부르고 있다고 소개한다. 우리나라 경우는 아주 애교 수준인 것 같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와 같은 직급인플레가 고용시장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불합리한 임금인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일상생활에 만연한 다양한 인플레 현상을 소개하고 있다. 심각한 현상중 하나가 대학의 '학점인플레'란다. 25년 전에는 영국 전체 학생 가운데 A학점을 받고 있는 학생 비율이 9%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27%로 4명중 한명이 A학점을 받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더 심하다고 한다. 대학에서 최고학점을 받는 비율이 1960년대에는 15%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45% 수준이란다. 거의 두 명중 한 명이 A학점이라는 얘기다. 이와 같은 학점인플레 폐해는 똑똑한 학생들을 평범한 학생 수준으로 가치를 깎아내리고, 기업 입장에서는 똑똑한 학생을 선별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호텔 및 항공업계에도 만연되어 있다. 호텔 최고 등급이 별 5개로 분류되어 왔는데, 신생 호텔들이 자체적으로 별 6개, 별 7개를 부여하고 있고, 객실 등급도 '디럭스 룸'이 최저 등급인 '스탠다드 룸'을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또 비행기 일반석을 지칭했던 '이코노미석'이라는 말이 자취를 감추고 '월드 트래블러' 등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여성 의류의 치수도 이러한 인플레 현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즉 '치수인플레' 현상도 심각하다. 사이즈 14인 영국 여성바지의 허리둘레를 조사한 결과, 최근 제품이 40년전 제품보다 무려 4인치가 커져 있다고 한다. 사실 요즘 사이즈 14가 70년대에는 사이즈 18 이었던 셈이다. 작은 치수를 선호하는 여성 심리를 이용해 판매를 늘리려는 의류업체의 전략적 계산이 반영된 결과다. 이런 현상이 먹는 산업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 흔히 접하는 피자 크기도 레귤러부터 시작하고, 스타벅스 커피잔에도 'tall'부터 시작해 'small'이라는 말이 금기어로 되어 있는 듯 하다고 꼬집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와 같이 사회 곳곳에서 만연된 인플레현상을 범인플레이션이라는 의미의 '팬플레이션(panflation)'이라 지칭하였다.
통상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화폐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 전형적인 인플레이션이다. 전세계 중앙은행들은 인플레 퇴치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직급인플레, 학점인플레, 치수인플레 등 다양한 현상도 상당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있고 사실상 당국의 통제범위를 벗어나 있다. 카를 오토 포헬 前 독일 중앙은행 총재는 “인플레이션을 한번 짜내면 다시 넣기가 거의 불가능한 치약”에 비유해 인플레의 사전예방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결론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제 모든 이들이 말 그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든 종류의 인플레이션 거품을 걷어 내야 할 때라고 역설하고 있다. 거품은 다양하게 사회 전반에 걸쳐 부지불식간에 커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고 다 같이 경계하고 노력해야만 물가안정 뿐 아니라 안정된 일상생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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