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작가는 동료 문인들과 영화 '은교'를 보고난 뒤, “소설을 한 달반 만에 썼다. 당시엔 영혼을 팔아서라도 젊음을 얻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의 분신일 극중 이적요가 은교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마치 꿈을 꾸듯 그녀와의 정사를 상상하는, 마음만은 청춘인 그런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때 노인이 아닌 혈기 방장한 젊은 이적요의 모습이다.
70대 노시인 이적요의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는 혼자 옷을 갈아입다 앙상하게 마른 자신의 벗은 몸을 힘없이 바라본다. 장작 같이 메마른 몸은 열일곱 소녀 은교를 만나면서 생기가 돈다. 빵을 먹지 않는 그가 '은교표 샌드위치'에 관심을 보이고 그녀의 작은 몸짓에도 당황해하거나 설렌다. 그리고 불이 붙는다. 괴테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솟구치는 젊음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오른다. 싱그러운 젊음과 관능에 매혹당한 그에게 사랑은 '살아야 하는 이유', 존재론적 의미가 된다.
갈망하는 사람은 또 있다.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 그는 스승의 문학적 재능을 탐낸다. 급기야 스승의 작품을 훔쳐 문단에 발표하는 부정을 저지른다.
이처럼 영화 '은교'는 아름다움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느끼는 노년의 예술가, 그가 잃어버린 순수와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좌절, 더 나아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꾼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다.
정지우 감독만큼 '매혹'을 잘 표현해내는 사람은 드물다. '해피 엔드'(1999)에서 전도연-주진모, '사랑니'(2005)의 김정은-이태성이 서로에게 끌리는 장면은, 화면은 고요하지만 그들의 가슴속에 얼마나 강렬한 파문이 일고 있는지 단박에 느껴진다.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그의 탁월한 재능은 '은교'에서도 빛을 발한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매혹과 관능이 눈부시게 그려지는가 하면 아름다운 영상 속에 조금씩 격앙되는 세 남녀의 질투와 분노, 배신 그리고 살의의 감정이 섬세하게 다가선다.
감독이 원작과 달리 새롭게 만든 마지막 장면, 이적요의 얼굴에 천천히 번지는 눈물과 애수 가득한 은교의 목소리가 완성하는 여운 짙은 그림은 그가 가진 재능을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섬세한 감정의 결에 김고은의 싱그럽고 파릇파릇한 매력, 생동감 넘치는 연기는 팔딱거리는 활기를 불어넣는다. 맑은 웃음소리와 해사한 얼굴은 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도발적인 은교 역할에 썩 잘 어울린다. 절제와 분출의 균형을 잡은 감정연기도 좋다. 성적으로 대상화되기 쉬운 역할의 한계까지도 가볍게 유희하는 듯한 느낌으로 넘어선다.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노출 수위는 예상보다 높은 편이다. 하지만 성기나 음모 노출이 등장하지만 외설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이적요가 소녀와의 정사를 상상하고 그 순간이 영상으로 그려지지만, 이 환상신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아서 애잔하다.
노인의 사랑은 '주책'일 뿐인가. 그렇다. 나이든 어르신들의 마음속에도 '청년'이 있다.
안순택 기자 soo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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