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일 사회단체부장 |
16세에 미군 대위의 양자로 입양된 그는 18세에 부산 영도에서 배를 타고 미국 길에 올랐다. 다시는 조국을 찾지 않겠다고 침을 뱉으면서 떠난 소년은 성공해서 다시 돌아와 부산 영도에서 잘못했다고 큰절을 했다.
참전을 마치고 귀국해 치과의사가 된 양아버지는 정이 많고 따뜻했다. 소년이 이국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너무도 외로워 울고 있으면 가만히 다가와 그를 감싸안고 위로해줬다. '난 너를 믿는다'고 말하며 포근히 안아주고 격려해주는 양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에 힘입어 소년은 하루 3시간씩 자고 열심히 공부해 워싱턴 대학에 합격했다. 이후 석박사학위를 받고 31년간 워싱턴대에서 교수생활을 했던 그는 91년 워싱턴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연이어 동양계 최초로 상원의원에 당선돼 내리 5선을 하며 현재 상원의원 부의장이 됐다.
그는 그 이후 고국을 찾아와 영등포에 살고 있는 친아버지를 만났다. 배운 것 없고 먹을 것 없어 남의 집 머슴살이로 팔려갔다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그동안의 원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아버지를 미워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는 이후 친아버지와 계모를 미국으로 모셔와 편안히 임종을 맞을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는 친아버지와 계모 사이에 태어난 이복동생 5명도 모두 미국에 데려와 공부시켜 잘 살도록 터전을 닦아주었다. 양아버지와 양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세명의 미국인 남동생들과도 그는 지금까지 너무나 우애 깊게 잘 지내고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양아버지를 떠올릴때마다 눈물이 글썽해지는 그는 77세 나이인 지금도 수시로 양아버지 묘소에 가서 기쁜 일, 슬픈 일을 모두 말하며 양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오는게 큰 기쁨이다. 90세 된 양어머니는 여전히 그가 극진히 섬기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다. 양부모님이 자신을 입양해 키워주셨듯이 그도 2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미국에서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인권 운동과 더불어 인종 차별을 없애는데 일조한 그는 현재 한미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20년 후에는 한인 미국대통령이 반드시 나올 것이란 확신을 전해줬다.
늘 '왜, 왜, 왜?'를 외치며 불안과 초조속에 비관적으로 살다가 양부모님의 헌신적인 관심과 믿음과 사랑 덕분에 긍정적인 사람이 됐다는 그는 '미국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라며 두 나라의 다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고향 삼천 접어 놓고/자유 찾아 기회 찾아/산 넘고 바다 건너 이역 만리//이방 땅에 뿌리 내리려/귀머거리 삼년에 벙어리 삼년/눈치 보며 다시 십년//순간 순간 고비마다/님 계신 동쪽 하늘 향해/흘린 눈물로 시내가 되었는데//고목이 된 무릎 일으켜/희미한 눈 들어 보니/어이쿠/어느새 저토록 자랐을까/들판 가득한 어린 나무들//이제 스러진 날 멀잖은데/그 손에 쥐어 줄 것 무엇인가//씨뿌리는 농부처럼/저들의 가슴에 꿈을 심으리라//꽃피고 열매 맺어/이 땅을 정복하라고.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이 필자에게 건네준 그의 자작시 '오직 나의 길'이다.
신호범 의원이 김신옥 대성학원 이사장과 도완석 복음신학대학원 교수와 더불어 전세계 각국에 흩어져사는 17만명의 한국인 입양아들을 위한 국제학교 설립 협의차 지난 주 금요일 대전을 방문했을 때 그와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가슴이 뭉클하고 감동이 전해져왔다. 따뜻함과 겸손함, 온화함과 자애로움, 인자함과 뛰어난 유머감각까지 겸비한 신 부의장은 인간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호인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매너가 몸에 밴 편안함이 느껴졌다.
도완석 복음신학대학원 교수가 제작한 신 부의장의 일상을 다룬 20분짜리 다큐 동영상을 보면 가슴 벅찬 감동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본인을 입양해준 미국인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는 신 부의장은 자신처럼 입양아 출신들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과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2년후 세종시에 입양아들을 위한 국제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그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