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병조 금강대 총장 |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들 삶의 질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다이어트를 하고 성인병을 염려하는 요즘 세태가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어느 사회학자의 통계를 보면 50년 전보다 우리는 3백 배 이상을 잘 산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 근거는 모르겠지만 비약적인 물질적 행복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1950년대만 해도 목욕시설이 형편없이 불편했다. 샤워시설이 있을 리 만무하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물을 데워서 일본식 오목솥에 담아서 목욕을 했다. 조부모ㆍ부모ㆍ형을 거쳐 드디어 내 차례가 되는데, 그때마다 놀라운 점은 이 뜨거운 물에 할아버지ㆍ아버지는 어떻게 들어갔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때는 라디오 방송이 전부였었다. 인기 있는 연속 방송극이 나올라 치면 온 식구가 라디오 주변에 모였다. 그러나 지금 지상파, 종편, 공중파, I P TV까지 정보가 흘러 넘친다. 20년 전만 해도 휴대전화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자동차 뒤에 높다란 카폰 수신기를 달고 다니면 곧 특권층이라는 암시였다. 요즘에는 내 손주들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논다.
그 뿐인가. 시간의 단축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현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교통 혁명일 듯싶다. 옛날 구법승들은 중국 서안을 거쳐 돈황에서 부터 이른바 실크로드를 경유했다. 천산남로(혹은 북로)를 거쳐 카쉬카르, 훈자, 길깃트를 지나 인도에 이르는데, 대략 편도에 3년 반 정도가 걸렸다. 요즘은 비행기로 델리까지 8시간 정도다.
그러나 높아진 삶의 질만큼 우리가 반드시 행복해 진 것은 아닌 듯싶다. 그때는 가난했지만 이웃 간의 정이 있었다. 범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좀도둑이 전부였다. 토막살인 등 끔찍한 범죄를 볼 때마다 장독대 뒤지던 옛날 도둑들이 그립다. 형제간에 소송하고, 부자간에 의절하고, 황혼이혼은 갈수록 늘어난다. 아무리 물질이 풍요스러워도 행복은 그를 뒤따르지 못하는 모양이다. 참혹한 일에 시달리다 보니 무감각해진 도덕성도 문제다.
웰빙이란 결코 외형이 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들 내면세계가 너그러워져야 하고 행동 자체가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빵 없이도 못 살지만, 빵만으로도 살지 못한다. 계절의 순환이 있듯이 우리들 삶에도 오르내림이 있다. 지금 나의 인생은 중턱에 있는지, 해질녘에 있는지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연륜에 어울리는 삶의 가치를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젊은이들의 객기도 문제지만, 늙은이들의 노탐(貪)도 꼴불견이다.
성공한 인생이란 결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백두산만큼 돈을 모았다는 사실로 평가될 수 없다. 오히려 얼마만큼 남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나를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인생이 나와 가족을 위한 이기적 삶의 형태로 끝나지만, 그 헌신의 대상을 이웃, 사회, 인류, 중생계로 넓혀가는 삶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먹고 자는 것만 웰빙일 뿐 여전히 후진적인 사고(思考) 속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넓은 집에서 호의호식을 즐긴다 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법구경』에는 이런 금언이 있다. “천군만마를 이긴 자보다 자기 자신을 이긴 자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이다.”
참다운 웰빙이란 바로 인간다운 삶, 타인에 대한 배려로 가득한 인생일 듯싶다. 얼마나 살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사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좋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웰 빙의 핵심이다. 남을 미워하고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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