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그리고 정치엔 바람둥이의 “오빠 믿지?”처럼 불멸의 재탕 공약, 판박이 공약 레퍼토리가 있다. “오빠 한번 믿어봐.” 그 알량한 전형성마저도 개차반으로 만든 건 민간인 불법사찰이다. 그것이 한쪽은 내상을 입지 않는 꽃놀이패일지는 귀신도 모를 일이지만 처음부터 정책선거는 네거티브한 풍토에 맞선 양념 치기였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위헌 결정이 났지만 거짓공약은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에게 '알바'가 아닌 연애할 시간을 주겠다고 공약하는 후보가 더 솔직해 보인다.
지역구 의원 선거에 지방이 안 보인다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정치적 실천의 미니어처인 명함, 질리도록 많은 현수막들을 보면 거꾸로 정책과잉이 걱정된다. ○○ 학교 설립, ××× 신축, △△△△ 유치와 같은 기초의원 선거에서나 본 동네공약도 많다. 각 지자체는 지역 현안을 정책과제로 발굴해 공약화를 요구했고, 시민사회는 약간 생뚱맞게도 양대 선거를 지방분권국가 실현 계기로 삼자고 한다. 꿈이 실현되면 지방은 지지리궁상 떨지 않아도 될 테지만 말이다.
정책선거의 뿌리가 부실한 다른 이유도 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규정한 '오세훈법'을 안 지키고는 정치 못 하지만 공약은 안 지켜도 '경찰차 출동 안 한다'. 비교평가, 선거공약검증(매니페스토) 장치는 얼마나 또 허술한가.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집계한 공약 완료율은 대전 14%, 충남 26.14%, 충북은 40.11%였다. 공약은 그저 미디어마케팅이었다. 하긴 정책대결이 부각된 1995년 6ㆍ27 지방선거 이후 정책이 선거쟁점인 예는 없었다. 공공선의 관점, 선거문화 개선론으로나 가치 있었다.
더구나 대선을 앞둔 선거라 어떤 정책도 결정적 한 방 앞에, 집권당 심판과 정권교체나 야당 심판과 정권 재창출의 한 줄짜리 정치 구호 앞에 맥을 못 춘다. '김영삼 정권 심판하자→노무현 정권 심판하자→이명박 정권 심판하자'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 계열이다. 유일한 지역군소당 자유선진당은 공동정권 창출의 복심을 말하기도 한다. 정당정치 유동성이 큰, 정책정당 아닌 선거정당들이 정책선거라니 가당찮다. 이러려면 지역 대표선수를 뽑는 하원과 전국 대표선수를 뽑는 상원의 양원제를 검토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대전대 안성호 교수 등은 양원제를 주장한다.
정책의 차별성도 그게 그거다. 싫어하는 정치인을 피하는 구실도 한다는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점퍼의 색감처럼 꼭 선명한 노선일 필요는 없다. 정책 대결은 주요 정치적 프로젝트나 정치상황에서 요구되지 늘 그렇지는 않다. 또 미래 정책만이 아닌 과거 4년의 정책과 공과도 평가 대상이다. 실제 정책 경쟁이라 해봐야 도토리 키재기다. 중도일보 여론조사를 들여다보면 공약관심도가 이만한 게 신기하다. 사회경제적 변수, 개별정당에 대한 태도, 정치적 이념 등과 투표 성향의 일부를 이룬다.
문제는 어떤 공약이냐다. 예산타당성과 실현가능성, 비용 대 편익분석의 공익성, 지역경제의 총량적인 성장에 관련된 최적화된 경제적 언어인가다. 효율적인 비교 분석의 기회인 TV 정책토론회도 진정한 '정책토론'의 한계를 드러냈다. 선관위 위원으로 각종 선거의 방송토론에 관여한 필자의 실증적 경험으로는 TV 토론은 정치적 의사소통 수단이지만 재치능력, 입심의 소소한 변별력에 머물 때가 많다. 미래기획적인 정책대결이 정치발전에 무슨 소용일지, 이럴 때 회의감이 밀려온다.
결과가 정책검증 아닌 선거구호로 끝날 때는 허무감마저 보태진다. 지금도 유권자 판단을 돕는 정보의 집합이 아닌 신기루 같은 베끼기 공약, 묻지마 공약, 닥치고 공약으로 정책선거 하잔다. 그래도 단 하나뿐인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듯 '쿨'한 선택은 해야 한다. 사랑도 인생도 리셋과 신축은 어렵다. 과거를 안고 증축할 뿐(김혜리 20자평)이란다. 캠페인을 어떻게 조직하고 기획하느냐에 좌우되는 선거도 그렇다.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점, 출렁이는 표심을 놓치면 영영 실패한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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