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나는 그다지 말하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가끔씩 '말'을 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평소에는 무심하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눈에 불을 켜고 말하고 싶어지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의 일이다. 그래서 그때 뱉어내는 말들은 대부분 후회를 부른다. 나는 말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글로 적는 것이 편하다. 글은 수가 틀리면 지워버릴 수라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단 말을 뱉어버리면, 그것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얼마 전, 나는 술기운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몸살기운에 취해서인지 두서없는 말을 얼기설기 뱉었다. 나 스스로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황당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말이 생각보다 앞서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전날 밤의 나를 자책했다. 내가 내뱉었던 것들은 정치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교육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자리를 함께 했었던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이야기들을 주워섬겼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도 나지 않을 만큼 부끄러웠다. 기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제 와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 혀에 걸린 주술은 내가 나를 과시하려는 욕망에서 온 것이 아닐 런지. 말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모두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나는 더욱 더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기 과시의 천박한 욕망이 그깟 몸살기운에 술 한 잔 얹혀졌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다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말로 인해 생기는 실수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자신을 과시하려는 말 속에 싹트는 오해다. 자신을 과시하는 말은 곱지도 못할뿐더러 가볍기까지 하다. 차라리 상대방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 그것을 풀어내려는 말이라면 이야기의 목적이라도 있다 하겠지만, 자신을 과시하는 말에는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순전히 자기과시의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말은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고역이고 후에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 뻔하다. 옛말에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고개를 숙이고 입이 제 멋대로 열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얼핏 생각하고 난 후에야 입을 열어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입을 여는 순간에도 머리는 생각을 시작하지 않은 채 잠자코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렇게 입을 함부로 열지말자고 다짐하지만, 혀의 욕망은 이성보다 몇 십 배 강한 찰기를 가지고 입을 열어젖힌다.
그러고 보면 비단 말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거의 모든 행위는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하는 일은 쉽게 티가 나고 또 반감을 사게 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 누구라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조금 더 신중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김집 선생은 자신의 호를 신독재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다잡는 데 있어서 혼자 있을 때조차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선생의 의지는 지금의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욕망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을 연마하는 데 집중했던 그처럼 나도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말을 하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때가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럴 때야말로 자신을 스스로 다스려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말로 맺은 것들은 그 어떤 힘도 가지지 않은 채 허물어지기 쉽다. 자신이 정말 지켜야 할 것이라면 말로 하기보다 자신의 가슴에 새기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쭙잖은 허세와 자기과시욕에 휘둘리지 않고 홀로 있을 때에도 고요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요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 는지…. 나는, 우리 사회가 공허한 말들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며, 나 또한 나의 말에 잠식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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