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임 충남대 예술대 음악과 부교수 |
음악 분야에서도 많은 평가가 행해지고 있다. 국고나 문화예술위원회 기금의 지원을 받은 사업들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고, '문광부장관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연대회들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밖에 문화나눔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저소득층 혹은 위탁시설을 위한 사업들도 평가의 대상이 된다. 적든 많든, 경비든 명칭이든 지원을 받게 되면 그에 따른 평가가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이 과거의 상황과 달라진 점이다.
그런데 평가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많은 부분이 정량적 기준, 즉 수치에 의해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우려스런 마음이 든다. 과연 정해진 수치에 의한 평가가 문화사업에 대한 바람직한 평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바꾸어 말하면 요구하는 수치만 정확하게 맞추어주면 질 좋은, 완성도 높은 사업 혹은 공연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비단 음악 분야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학계에서도 똑같은 잣대에 의해 모든 국립대학교와 모든 학과들, 모든 교원들이 평가를 받는다. '똑같은 잣대'라는 용어는 언뜻 들으면 매우 공정하고, 매우 합리적인 단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용어는 그러한 '똑같은 잣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공평함, 불합리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괴한인 프로크루스테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데려와 쇠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길면 긴만큼 자르고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렸다고 하는데서 유래한 말이다. 결국 자신이 세운 기준에 모든 일들을 억지로 맞추어 판단하는 아집 혹은 편견을 비유하는 말이리라. 신화니까 가능한 그런 말이라고. 그런데 사회 각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가의 잣대가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한국연구재단에서 한국에서 발간되는 학술지를 등재지와 등재후보지로 선정해주는 사업이 있다. 처음에는 학술단체들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등재지로 선정되든 선정되지 않든 내용만 충실하면 된다는 학자들 특유의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논문이 등재학술지에 실렸는지, 등재후보학술지에 실렸는지, 일반학술지에 실렸는지에 따라 점수에 차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점수는 대학교원임용이나 재임용, 승진, 업적 평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국 학술단체들은 한국연구재단의 평가 기준에 맞추어 학술지를 바꾸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논문의 질적 수준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많은 수치들에 맞추어 학술지를 등재지나 등재후보지로 만들고 그 위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교과부에서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등재제도 자체를 아예 없앤다고 한다. 등재학술지라는 것이 논문의 질적 평가를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수치로 계산된 기준에 의한 평가의 허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숫자에 맞추어 성과의 유무, 사업의 성패, 가치의 높고 낮음이 결정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숫자에 맞추어 나갈 수밖에 없어 동분서주해야 하는 이 시대의 상황이 마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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