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팀장 |
꽃송이 같은 입과 부드러운 눈의 '테스'는 딸기익는 계절을 좋아하는 시골처녀였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몸도 마음도 순결한 테스를 파멸에 이르게 한 것은 딸기였다. 명문가의 바람둥이 청년 알렉은 빨갛게 무르익은 딸기로 테스를 유혹한다. 빨간 딸기가 테스의 도톰하고 붉은 입술 사이로 들어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스크린 가득 나스타샤 킨스키가 붉은 입술로 빨간 딸기를 먹는 모습은 빨강의 이미지가 얼마나 순수하고 에로틱한지를 보여준다.
빨강은 광기와 열광의 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열정과 광기가 자연스럽게 분출하지 못하면 빨강은 때론 폭력으로 변한 악의 상징으로 변한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에게 빨강은 고통스런 절규의 색이다. 그가 그린 '절규'는 하늘에는 태양의 피가 넘실거리고 해골형상을 한 남자는 옴짝달싹 못한 채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이다. 그림속의 빨강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을 준다.
임철우의 단편소설 '붉은 방'은 공포스런 빨강의 이미지가 소름끼치게 묘사된다. '붉은 방'은 주인공이 낯선 사람들에 의해 체포돼 고문당하는 공간이다. 사면 벽과 천장까지 시뻘건 선지피 빛깔의 방. 마치 뭉크의 그림속 사내가 온몸에 피를 뚝뚝 흘리며 방을 피칠갑을 해놓은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을 고문하는 공안 경찰은 6ㆍ25때 인공 치하에서 가족을 잃은 자로 원한과 증오의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분단의 시대, 고문의 시대, 정치적 무한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던 80년대 우리사회의 빨강은 피의 지옥, 그것이었다.
활활 타오를 듯하던 동백꽃은 언제였던가 싶게 성급히 봉오리째 떨어진다. 이지러진 처녀의 꿈처럼 동백꽃은 잿빛으로 짓이겨질 것이다. 시인 최영미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라고 아쉬워했다. 청춘이 가는 것도 모르고, 간 것도 모르고, 갈 것도 모르는 게 내 마음일까. 꽃은 소멸에 대한 예감에 떨며 낯선 방관자의 시선 앞에서 속절없이 지고 있다.
인생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유동성을 지니고 있다. 봄날 꽃들의 미친 듯한 풍요로움은 나무둥치에 낀 갈색 이끼를 잠시 잊게 할 뿐이다. 영원한 낙관주의자가 될수 없는 이유다. 세상은 노인들을 홀로 남겨 놓는다. 아무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꽃이 피든, 꽃이 지든 대전 용두동 박스 줍는 할머니는 늘 리어카에 매달려 다닌다. 몸은 잔뜩 쪼그라져 있고 아무렇게나 쪽져 있는 흰머리는 바람에 날린다. 리어카 손잡이를 단단하게 잡고 있는 손은 옹이 진 소나무 같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는 않지만 같은 마을에 산다는 점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
칼 마르크스는 “한쪽에서 부가 축적되면, 그와 다른 반대쪽에선 정신적 피폐함을 포함한 빈곤의 축적이 진행된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등한 거래가 실현된다. 2009년 1월 '용산철거민 참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자를 상대로 싸우다 새까맣게 타죽은 사건이다. 철거민이 타죽어가는 건물을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에워싼 시뻘건 불기둥은 자본의 횡포였다. '20세기는 폭력의 세기'라고 규정한 한나 아렌트의 말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와 무관한 것이 이세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흐르고 있으며, 일체의 탄생과 죽음이 그 흐름위에 실려 있다는 깨달음이다. 동백꽃이 피고지는 통영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산 언덕에 잠들어 있는 박경리의 말을 빌려본다. “불쌍한 것에 대한 연민,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설명없는 아픔, 그것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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