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조]아름답게 늙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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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조]아름답게 늙는 법

[목요세평]정병조 금강대 총장

  • 승인 2012-03-14 14:25
  • 신문게재 2012-03-15 20면
  • 정병조 금강대 총장정병조 금강대 총장
▲ 정병조 금강대 총장
▲ 정병조 금강대 총장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존재의 멍에다. 계절이 순환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삶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누구나 겸손해진다. 우리 사회가 유별나게 시끄럽고 다이내믹한 까닭도 따지고 보면 늙음과 죽음을 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늙음과 죽음이라면, 그에 대해 사색하고 준비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죽는 이야기를 하면 '재수없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제일이다'라는 말이 있을까.

그런데 늙는다는 것이 반드시 불행한 일이기만 할까? 행동이 굼뜨고 시력이 감퇴하고 직장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조금 섭섭하기는 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늙음에는 퍽 많은 프리미엄도 있다. 우선 여유와 너그러움이 장점이다. 젊은 날처럼 끊임없는 변화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 있다. 지하철도 공짜고 고궁관람료도 무료다. 동네 사우나에서는 2000원씩 깎아주기도 한다.

햇살도 지는 해가 고운 법이다. 여명의 밝음은 희망의 빛이지만 지는 해는 관조(觀照)와 달관의 고즈넉함이다. 우리가 영원히 젊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행복할까. 늙음을 전제할 때 젊음은 아름답고, 죽음을 예비할 때 삶은 가치로운 법이다.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공부할 필요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한 오백년 놀다가 그 다음 5000년 쯤 공부하고, 또 5만년 쯤은 직장생활을 하면 그만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은 중요하고, 인생은 값진 것이다. 영원하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공(空)을 말한다. 공이라는 어휘는 단순히 비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없다고 표현하려면 없을 무(無)자를 쓰면 된다. 그러나 공은 비었지만 차있다는 변증법적 공이다. 즉 그릇된 것은 비웠지만, 착한 것은 가득 차있다는 뜻이다.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불공(空)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허공을 생각해 보자. 허공은 잡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가르고, 일체를 포용한다. 공이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늙음의 또 다른 장점은 안목의 깊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혹은 자연의 사소한 움직임 속에서도 지혜를 터득한다. 세상이 만만치않다는 것도 깨닫게 되고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만은 아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고령화시대라는 변화의 급류에 휘말려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이제 인류는 수명연장과 함께 삶의 질(質)을 우려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맞고 있다. 2020년이 되면 우리나라 인구의 4분의 1이 노년층이 된다. 여태까지의 사회적 인식은 60세를 기준으로 노년인구를 산정했다. 그러나 평균연령이 이미 75세(여성은 80세)를 넘는 현재의 상황은 노년의 기준을 상향시킬 수밖에 없다. 60세 정년이던 시대를 기점으로 보면 정년이후 20년의 알토란 같은 나날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노후대책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을 나는 '인생공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했던 공부는 자격을 따고 돈을 벌기위해 했던 학업이다. 그러나 '인생대학'에서의 공부는 학위도 없고 자격증도 없다. 다만 가치로운 길, 지적(知的)만족, 평안한 마음의 여로를 완성시켜줄 뿐이다.

음미할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은 실패한 삶이다. 사람은 돈벌고 출세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남을 위한 헌신도 있어야겠고, 적당히 고독을 즐기는 여유도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발전신드롬이라기보다는 관용의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늙음은 소중한 인생의 단면이다.

나는 젊음보다 늙음을 사랑하고 아낀다. 그들의 여유로운 몸짓과 향기로운 말씨를 느끼면서 참 늙기를 잘했구나하는 뿌듯함을 지울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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