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효순 미술평론가 |
1963년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은 17살 때 고국을 떠나 일본과 독일에서 공부하고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한 작가다. 그는 가족과 두 형들이 일본에 귀화했을 때도 한국 국적을 끝까지 고집했던 화가다. 국력이 약하고 작은 나라의 여권으로는 제한받는 지역이 많았던 시절에도 한국여권을 고집하던 그였지만 섣불리 애국하면 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워싱턴DC국립미술관'에 있는 작품으로 황색 모시두루마기에 모니터를 설치한 마지막 작품 '엄마(ommah)'다. 서양식 해석으로 표기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용인에 백남준 미술관이 있고 미국에서 타계한 후 유분이 고국에 돌아와 안치되어 있다.
조각가 문신의 국적에 관한 일화 중에는 1979년 (후에 프랑스 대통령이 된) 당시 '시라크' 파리 시장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문신의 조각에 매료된 시라크 시장이 문신을 프랑스로 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문신과 동향이던 박종규(전 경호실장)를 파리특사로 보내 대통령 뜻을 전달하고 귀화를 막았다고 한다. 그 해 문신은 30여년 만에 박종규를 따라 귀국 했다. 문신은 1992년 파리에서 영국의 헨리무어나 프랑스의 알렉산더 칼더와 함께 '세계3대 거장전'에 초대돼 '파리시립 미술관'에서 전시할 만큼 해외에서는 정평 있는 작가다. 지금은 마산시에 문신미술관이 있어 그의 작품에 대한 브랜드화에 노력하고 있다.
이응노는 54세에 프랑스로 떠나 한국에 대한 정체성이 작품전체에 깔려 있는 작가지만 막상 그의 국적은 프랑스다.1983년 한국국적에서 제적되었다. 이것은 그의 험난한 인생역정 속에서 파생된 결과지만 대전에 이응노 재단이 있고 홍성에 기념관이 있는 상태에서 바라 볼 때는 크게 아쉬운 부분이다. 이응노 자신은 평생을 고국에 대한 연민으로 한국말 밖에는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산 화가인데 사후에는 프랑스 문화법에 따라야하는 부분도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현재 생존작가로 활동 중인 이우환은 서울대 재학시절 일본으로 유학가 공부하고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최근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초대되어 전시했고 국내 미술계에서도 블루칩으로 인식되고 있는 작가다. 그는 모노하(物派)를 창시한 선구자로 일본에서 45년 이상 살면서도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어 수상의 제약도 있었지만 한국의 문화재에도 애정이 남다른 작가다.
화가들이 해외에서 활동할 때 국적에 연연하다보면 행동에 제약이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은 국가이미지가 상승해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만해도 한국관이 없어 백남준이 독일대표로 참여해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작가들이 이렇게 자신의 국적을 버리지 않고 해외에서 크게 명성을 이어가며 국가이미지를 살려나가는데 비하면 국가차원에서 작가에 대한 배려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유학시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조국을 지켜 온 작가들을 세계브랜드로 만드는 일은 국가브랜드화로부터 시작됨을 정부가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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