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합리적인 시장경제란 공정한 경쟁체제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선순환구조에 기반을 둔다. 문제는 이 공정한 경쟁체제라는 것에 있다. 재벌이 떡볶이 장사까지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일자 해당 기업이 한 발 뺀 일이 있었다. 대기업과 골목의 서민들이 아무런 규제 없이 무한경쟁의 상황에 놓일 때 결론은 보나 마나 대기업의 일방적인 독주다.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 대자본의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지금 한국에서는 경제 민주화가 첨단의 화두다.
대기업과 골목상권의 공존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경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집약한다. 전지구적 차원의 대기업경제와 골목의 서민경제가 공존해야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지구적 차원의 명망성과 골목의 자생적인 문화생산이 공존해야 건강한 문화생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문화의 민주화라는 말로 담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경제민주주의와 문화민주주의는 결이 좀 다르다. 제도의 정착이라는 면에서 문화민주주의는 이미 이뤄진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근대시기의 독점적인 문화 생산과 향유 시스템은 미술관과 공연장, 출판 등의 근대적 공공영역에 의해, 다시 말해서 문예적 공론장의 확장에 따라서 민주적인 소통 체제로 전환했다. 전지구적인 명망성을 가진 예술가들의 작품을 동북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미술관제도의 정착에 따른 문화민주주의의 성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문화의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그 위계를 확대 재생산하는 양극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진행형이다. 동시대의 문제는 문화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낳은 문화의 양극화를 넘어서는 일이다.
정보의 민주화에 따른 변화에도 굴곡이 있다. 신문과 방송 등 언론환경의 발달은 흩어져있는 다수를 하나의 덩어리(mass), 즉 대중으로 묶어 놓았다. 절대다수가 동시에 소통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개인의 창의성을 유린한 우민화(愚民化)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에 이르는 동시대의 정보통신 기술은 정보민주주의의 시대를 넘어 일반민주주의 자체를 재구성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매스의 일원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개인으로 거듭나기는 백가쟁명하는 시대다.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경제의 민주화, 나아가 정보의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시대다. 이 모든 일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의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문화 영역의 민주화 역시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한다. 전지구의 시민을 '매스'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어 두려는 거대한 힘이 작동하는 한 정치와 경제, 정보, 나아가 문화 영역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민주화의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2012년의 대한민국. 선거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재구성하는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우리를 한 걸음 더 성숙한 사회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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