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절의 의미를 후손들이 잊지 않게 교육하는 게 중요합니다.”
▲ 정완진 옹
|
그와의 첫 인터뷰는 “그 당시를 기억합니까”란 기자의 질문에 정 옹은 쉽게 말을 잊지 못했다. 먼저 간 친구들 때문이다. 그래도 정 옹은 일본인을 미워하진 않는다.
정 옹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일본인의 우수한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라며 “단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미움이다”고 술회했다.
어린 나이에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에 몸담아 활동했던 정 옹. 몸과 마음을 바쳤던 대한민국에서 당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주권을 행사했다. 아직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했던 16살의 정 옹은 선후배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주권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다. 정 옹의 어릴 적 용기는 오직 조국의 미래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위해서다.
정 옹이 활동했던 '태극단'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전국적 항일학생 비밀단체로 활동해왔다. 태극단의 투쟁방향은 조직확대로 전국의 학교와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해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태극단은 또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했다.
하지만 이들의 피 끓는 애국심은 배반자의 밀고로 날개를 펴지 못했다.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본경찰에 발각된 것이다. 정 옹을 포함한 태극단원들은 학교에서 수업도중 다른 단원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끌려갔다. 일제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대구형무소로 옮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정 옹은 사진첩을 꺼내며 일제의 고문으로 고인이 된 3명의 친구를 소개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지금처럼 여유로운 조국의 삶은 일제에 항거해 독립을 챙취하기까지 모진 고초를 겪은 동료, 선후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그는 평범한 노인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대전역 앞의 한 기원에서 친구들과 바둑을 두는 것이 삶의 낙이다. 그런 그에게 아직도 아쉬운 게 많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친구, 선후배들이 그토록 몸바쳤던 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 옹은 불만은 없다. 일제식민지 시대에서 떳떳한 세계적인 선진국대열에 올라선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과거 주권잃은 서러움을 대신했다. 2002년 한ㆍ일월드컵을 유치하며 4강에 올랐던 기적. 대한민국이 일본을 넘어서 전 세계로 뻗치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정 옹은 “용감하고 당당하던 동료들이 떠나가는 모습이 안타깝다”며 “3ㆍ1절을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이 더욱 강건한 국가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정 옹의 공훈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조성수 기자 joseongsu@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