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엔디컷 우송대 총장 |
내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업무중에 틈틈이 즐기는 여가활동이 바로 역사유적지 탐방이다. 특히, 이번 설 연휴 동안 아내와 나는 서울의 여러 곳을 방문했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자, 이제 우리가 다녀온 세 곳에 대해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한다. 덕수궁, 탑골 공원, 그리고 보신각 이렇게 세 곳을 열심히 답사했는데 특히 보신각은 보신각종을 걸어놓은 전통 한옥 누각으로서 시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서울의 삶의 속도를 조절해 주었다고 하던가?
우리가 서울 역사기행을 시작한 날은 1월 23일 이른 아침이었는데 그날은 영하 11℃의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닥친 날로 체감온도는 훨씬 더 낮았다. 하루 중 가장 추운 이른 아침에 도착한 덕수궁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고종황제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 3국이 그들의 제국주의 수립을 위해 한반도를 삼키려고 넘실거리고 있었던 그 시기에 고종황제는 위기에 빠져있는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던 왕이었다. 물론 덕수궁의 역사는 고종황제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를 침범했던 임진왜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나는 19세기 말과 20세기의 국제협력관계에 관심을 쏟고 있어서 덕수궁은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덕수궁 내의 건축물들은 동서양의 건축양식을 잘 섞어놓았고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대항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외세에 어떻게든 대항하려 했던 고종황제의 노력이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 주위에는 러시아 영국 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서 고종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요청을 하기 쉬운 곳이었다. 바로 담 너머 맞은편에 이들의 공사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덕수궁 내에 왕비가 거처하던 건물이 없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 재혼하지 않았으며 강제퇴위 후에 궁내의 함녕전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다른 건축물 중에는 환구단이 있는데 이곳은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예로부터 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한 곳이었다. 서구 열강에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보여주고자 했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이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낼 수 있음을 강조했던 제단이다. 환구단의 원래 터에는 현재 조선호텔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환구단의 정문은 다행히도 복원되어 있었다.
덕수궁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탑골공원이 있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대한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인 3ㆍ1 운동이 시작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독립선언서가 전국적으로 낭독되었지만 처음시작은 이곳이지 않았던가? 이곳은 나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의 공원이다. 한국이 독립을 위해 오랜 투쟁을 시작한 그 시발점이기 때문이며 이곳을 방문하면서 나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주의 렉싱톤에서 영국 식민지 정부하의 'Minute Men(미국독립을 위해 싸운 젊은이들)'과 비교해 보게 되었는데 한국은 평화적인 독립을 시도한 반면, 미국은 군사전쟁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추운 날씨에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더 많은 곳을 보기는 어려웠지만 아내와 나는 서울의 하루시작과 마감시간을 알려주었던 보신각의 역사에 아주 매료되었다.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이 종이 서울 시내 전역에서 들릴 수 있게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어떻게 우리 삶의 범위와 속도를 변화시켜주는지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얼마나 위대한 역사의 유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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