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수 대전충남 민언련 공동대표, 두리한의원장 |
서른 중반 즈음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고 정신이 없었다. 논문 제출 기한은 다가오는데 실험 결과가 나오질 않아서 애가 타들어 가던 참이었다. 일주일이면 두세 번씩 당시 실험을 진행하던 충북대를 방문했다. 볼일을 본다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충북대 학생회가 붙인 조그만 스티커 하나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습관적으로 정상인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었다. 그 스티커엔 작은 글씨로 “장애인의 반대말은 비장애인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받은 충격은 사실 망치 이상이었다. 그날 실험 결과를 받아들고도 건성으로 훑어볼 뿐, 그 문구에 담긴 뜻을 곱씹느라 머리가 먹먹했더랬다. 16년이 지났다. 세월과 함께 다행히 우리는 진보한다. 이제는 장애인의 반대말을 물어보면 똑똑한 학생들은 바로 비장애인이라고 답한다. 내가 겪었던 충격도 더 이상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당연한 상식이 돼버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얼마 전 법원에서 내린 판결을 보면서, 아직도 이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1급 시각장애인인 원고는 혼자 목욕탕에 입장하려다 주인의 제지를 받고 입장을 거절당한다. 이에 분개해 정신적 피해보상 소송을 냈고, 법원은 다음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시각장애인인 원고가 목욕탕 내에서 시설을 이용하던 중 사고가 발생하면 업주인 피고가 그 책임에서 언제나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피고가 동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은 원고를 목욕탕에 입장하게 하는 것은 피고에게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 등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정신적 손해의 배상을 청구한 원고의 주장은 이유가 없다.”
나는 이러한 판결이 일견 온당해보이지만, 시대정신인 평등과 복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정면으로 거스른 '닫힌 판결'이라 생각한다. 1급 시각장애인이라면 뜨거운 물이 있고 바닥은 미끄러우며 옷을 벗어 보관해야 하는 등 혼자 힘만으론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고를 염려한 목욕탕 주인이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거절한 것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 정당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정당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이 다른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장애인에 비해 사회적 강자인 비장애인들의 의무이자, 이 사회를 좀 더 따뜻하고 평등한 곳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인식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모두 학교폭력에 대해 걱정하고 근심한다. 그러면서도 피자가 늦게 배달됐다고 몽둥이로 배달원을 두들겨 패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학교폭력과 피자 배달원 폭행 사건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학교 폭력은 이 사회가 강한 자, 가진 자에게만 온정을 베풀고 쌍용차 노동자나 성적 소수자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적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의 학교판일 뿐이다.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이란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1급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거절한 주인은 처벌 받아야 하고, 음식을 배달시키려면 음식값에 버금가는 비싼 배달료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먹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사회적 약자들도 강자와 함께 평등해지지 않겠는가.
망치로 머리를 자주 두들겨서야 뇌가 견딜 수가 없겠지만,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사고가 우리를 덮칠지 알 수 없다. 길거리에 좀 더 많은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때, 그들이 격리나 수용이 아니라 출근이나 학습을 할 때, 우리는 야만의 사회가 아닌 사람의 사회에 살고 있게 된다고 믿는다. 그게 바로 잠재적 장애인인 우리 모두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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