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병조 금강대 총장 |
이 대결의 구도 속에서 건전한 중도세력이 기반을 잃는 것도 우려가 아닐 수 없다. '건강한 국가'라는 것은 이 중도세력이 튼튼한 나라를 가리킨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사회든지 특권층과 절대빈곤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이 둘의 완충지역이 중도세력이기 때문에 중도가 실종하면 곧 파탄을 면키 어려운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중도세력은 종교가 차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종교는 시대적 양심이며 건전한 가치관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혹 종교 가운데는 격렬한 투쟁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들은 언제나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세력임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혁명이나 계급투쟁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내면의 완성이며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사회참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가장 건전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전쟁·종교재판 등의 극단적인 역사경험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달라이라마같은 경우가 전형적인 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탄압을 피해서 60여년 전에 인도의 다람샬라로 망명하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티베트인들이 망명정부를 세우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고독한 투쟁 속에서 그는 단 한번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를 두 번 만났는데, 매우 솔직하고 꾸밈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법문의 내용도 쉽고 간결했다. 일본속담에 '사십 넘은 사나이의 인상은 그 사람의 이력서다'라는 말이 있다. 교묘한 언사로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그 얼굴모습과 표정까지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인상은 중요한 법이다. 텔레비전 뉴스에 나쁜 일 저질렀다고 나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들유들하고 뻔뻔해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간에 어느정도 '고독의 그림자'가 느껴져야 한다. 삶을 관조할 줄 아는 지혜, 남을 배려하는 사회야말로 훌륭한 국민이오, 나라다. 달라이라마의 법문은 결코 어렵거나 요령부득의 언사가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영어가 오히려 진실성있게 다가선다. 그는 자비를 강조하였는데 그 해석이 귀담아들을만 했다. “불교의 요체는 자비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베푼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베풀지는 못하지만, 해치지 않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불교는 선악의 극단적인 가치관을 갖지 않는다. 대칭적으로 선과 악을 대비시켜야 할 경우에도 언제나 선과 불선(善)이라고 표현한다. 또 그 중도의 가치관을 무기(無記)라고 설정한다. 요컨대 선도 아니고 불선도 아니라는 뜻이다.
자비는 적극적으로 남을 위해 헌신한다는 뜻이지만, 그렇게는 못할망정 해치거나 불행을 주는 일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해는 바뀌었지만 우리 사회의 대립과 원망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제 우리 모두는 용서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세상을 원한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업중생이라는 평범한 인식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붉은 안경을 쓰면 세상은 온통 붉지만 푸른 안경은 전혀 다른 세계다. 앞서 말한 붉고, 푸른 안경은 바로 우리들의 편견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그 편견의 안경을 벗어던져야 한다. 자비를 흔히 소극적인 평화의식이라고 보기 쉽지만, 사실 자비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평화수단이다. 모든 국민이 자비를 품고 살수는 없지만, 자비로운 마음씨를 가진 이가 더 많은 사회가 바로 극락정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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