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의용 대전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교수학습개발센터장 |
아내가 괴로운 표정으로 문을 열어준다. 남편이 묻는다. “왜 어디 아파?” “가슴이 답답해서….” “약 먹어! 병원 갖다 오지 뭐했어?” 아내는 방문을 세게 닫고는 이불을 덮고 누워버린다. 밥도 안 차려준 채….
“교수님, 저 지난 시간에 다리를 다쳐서 결석했습니다. 과제 좀 받아주세요.” 학생의 말에 교수가 말한다. “안 돼! 진단서 떼와, 출석은 인정해줄게.” 학생의 표정이 이내 일그러진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광경들이다. 사람과 사람은 하루에도 수백 번이나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며 살아간다. 말이나 표정, 행동, 도구 등을 통해 의미와 감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의미'를 주고받는 건 그런대로 익숙한데, '감정'을 주고받는 건 퍽 서툴다. 상대방이 나에게 '의미'를 전하는 건지, '감정'을 전하는 건지 구분을 하지 못해 갈등 사태를 자주 맞곤 한다.
머리 소통은 그나마 되는데, 가슴 소통은 왜 잘 안 될까? 센서에 녹이 슬었거나 고장이 나서다. 전인교육(全人敎育)이란 게 있다. 지·정·의(知情意)가 완전히 조화된 원만한 인격자를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 학교, 학원은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는 지식과 지능교육에만 혈안이다.
음악, 미술, 체육 등을 충실히 가르치는 학교가 별로 없다. 아이들의 감성을 길러주던 문학의 밤, 합창 발표회, 시 낭송회, 연극 발표회 같은 활동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학교와 학원과 집이 '머리'만 크고 '가슴'은 작은 기형 인격체를 경쟁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여기에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혼자' 갖고 놀 기기들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의 '가슴 소통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어른들의 감성도 마찬가지다.
감성 센서가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상사를 욕하는 남편, 머리가 아프다는 아내, 몸이 아팠다는 학생, 맞고 들어와 우는 아이가 가슴으로 보내는 감성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그 김 부장 이상한 사람이네. 당신 속상하겠다. 그지?” 남편은 아내한테서 이런 얘기를 듣고 싶은데, 머리로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제시하려 한다.
더 심각한 것은 감성 센서가 작동하지 않으면 기쁨, 슬픔, 분노, 수치심, 미안함, 고마움, 불쌍함, 추함, 아름다움, 사랑, 미움 같은 다양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한다. 다양한 감정의 색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몇 가지 색만 보는 감정 색맹이 된다. 사람의 행동은 감정의 제어를 받도록 창조되었다. 부끄럽고 추하고 미안한 일은 스스로 꺼리게 되어 있다. 감성 센서가 작동을 안 하니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흉악한 짓이고, 무엇이 부끄러운 짓인지 알지 못한다.
내 감성 센서를 점검해보자.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의 이름들을 한번 적어보자.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10개의 감정 이름을 찾아 적지 못한다면, 지난 한 달 동안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거나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본 적이 없다면, 또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외울 서정시 한 편, 부를 노래 한 곡이 없다면 내 감정 센서에 녹이 슬지 않았는지 한번 살펴볼 일이다. 이젠 녹슨 감성을 회복하고 머리와 가슴을 통해 입체적으로 소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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