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동네 빵집들이 사라지고 있다

  • 오피니언
  • 사외칼럼

[민찬]동네 빵집들이 사라지고 있다

[시론]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1-25 14:17
  • 신문게재 2012-01-26 21면
  •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소설가 오정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간직하고 있는 '유년의 뜰'에는 도넛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여덟 살 무렵의 일이다. 아버지가 도시로 직장을 옮기게 되자 식구들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곧 이사를 하리라던 계획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시골 살림을 거둬도 도시에서는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진급을 미룬 나는 학교에 가는 대신 들로 산으로 영문도 모른 채 뛰어놀았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는 주말이 되면 시골집을 다녀가셨다.

그때 나는 도넛을 처음 먹어봤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의 가방 안에는 난생처음 보는 물건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얗게 설탕을 두른 그것은 입에 대기가 무섭게 부서졌고 부서지기가 무섭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렇지만, 나에게 배당된 것은 늘 하나 아니면 둘이었다.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 사라져버리는 도넛의 여운은 그다음 주말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이어졌다. 세상에 그렇게도 맛 좋은 빵이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시골 점방에 걸려 있는 눈깔사탕에 꽈배기, 기껏해야 풀빵을 사서 호호 입을 다시던 시골아이에게 도넛의 환상적인 맛은 도시 그 자체였다.

2학년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 도시로 나와 살게 된 동네에는 마침 골목시장이 있었다. 골목 양편으로 어물전과 신발전과 옷가게 등이 있고, 가게 앞으로는 시골 아주머니들이 푸성귀를 갖고 나와 주욱 앉아서 손님들을 기다렸다. 점포도 몇 개 안 되어 난전에 가까웠지만, 저녁 무렵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놀이터 없는 우리들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니는 그것이 재미였다. 그런데 어느 날, 골목시장이 끝나는 지점에 간판도 없이 빵집이 문을 열었다. 반들반들한 크림빵과 우툴두툴한 곰보빵. 먹을 기회도 많이 없었지만 아이들을 못내 설레게 한 것은 빵을 구울 때 나오는 냄새, 그 기막힌 냄새였다. 한여름철 밤이 되면 더위를 이기지 못해 동무들과 시내 구경을 나갔다. 해만 떨어지면 다니는 사람도 차도 거의 없었던 그 시절, 우리들은 가물거리는 가로등 아래서 도청 공보판의 사진 구경을 하는 것이 큰 재미였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것은 따로 있었다. 공보판 옆에 있던 '승리당' 빵집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재미였다. 하얀 크림으로 덮인 케이크 위에는 집도 있고 나무도 있고 병정도 있었다. 눈으로 그렇게 빵맛을 보는 것으로 한여름 밤의 산책은 끝이 나고는 했다.

입으로 맛을 보고 코로 맛을 보고 눈으로 맛을 보던 그 유년의 빵은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 대학 시절의 기억으로 다시 이어진다. 아르바이트로 제법 주머니가 두둑해진 어느 해 겨울 때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 돈으로 뭘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은행동 '델리제과'로 걸음을 옮겼다. 크림빵, 곰보빵, 단팥빵, 도넛 등을 가리지 않고 한보따리를 마련해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성탄절 노래를 부르는 대신에 우리집 형제들은 그 해 몇날 며칠 동안을 벽장 속에 넣어둔 빵을 꺼내 먹는 재미에 골몰했다.

동네 빵집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며 다시 유년의 기억 속에서 빵을 떠올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사의 내용대로 동네 빵집이 어느 한순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델리제과'가 있던 곳에는 '파리바게뜨'가 들어섰고 '승리당'이 있던 자리에는 '뚜레쥬르'가 문을 열었다. '뚜레쥬르'는 전국에 1407개 점포가 있고 '파리바게뜨'는 현재 3010개 점포가 성업 중에 있다고 한다. 반평생의 업을 때려치우고 어느 날 '파리바게뜨'로 이름을 바꿔 단 아파트 입구의 빵집 아주머니는 축하하는 인사를 손사래 치며 사절했다. 프랜차이즈의 기회를 못 잡고 난전으로 밀려난 수제 빵집들은 오늘도 1000원에 3개를 외치며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시장에 뛰어들었거나 준비 중에 있어 빵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베이커리 전문점 '아티제'는 S그룹의 딸이, '달로와요'는 또 다른 S그룹의 딸이, '포숑'은 L그룹의 딸이, '오젠'은 H그룹의 딸이 각각 운영을 시작했거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대기업들의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사업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이 엊그제 일인데 다시 아흔 아홉 섬 가진 자들이 한 섬 가진 자의 망태를 넘보고 있다. 무차별 경쟁의 끝은 무한 집중이다. 신자유주의가 드리운 그늘이 내 '유년의 뜰' 한가운데까지 밀고 쳐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유성 둔곡 A4블록 공공주택 연말 첫삽 뜨나
  2.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3. [기고] 공무원의 첫발 100일, 조직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4.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5. JMS 정명석 성범죄 피해자들 손해배상 민사소송 시작
  1. 대전보건대, 대학연합 뉴트로 스포츠 경진·비만해결 풋살대회 성료
  2.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3. 한국자유총연맹 산내동위원회, '사랑의 반찬 나눔' 온정 전해
  4. 구본길에 박상원까지! 파리 펜싱 영웅들 다모였다! 대전서 열린 전국 펜싱대회
  5. 대전시, 여의도에 배수진... 국비확보 총력

헤드라인 뉴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27일 낮 12시께 눈발까지 흩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전 중구 한 교회의 식당은 뜨끈한 된장국에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식당 안에서는 대전자원봉사연합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150여 명의 어르신이 빼곡히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얇은 패딩과 목도리 차림인 어르신들은 강한 바람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밥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한 어르신이 식당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가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은 75세 이상의 독거 노인이다. 매일 혼..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창단 후 첫 K리그1 승격에 도전하는 충남아산FC가 승강전 홈경기를 앞두고 관심이 뜨거워 지고 있다. 충남아산FC는 28일 대구FC와 승강전 첫 경기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홈 경기로 치른다. 홈 경기장인 아산 이순신종합운동장 잔디 교체 공사로 인해 임시 경기장으로 천안에서 경기를 하게 됐다. 승강전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28일 홈 경기 사흘 후인 12월 1일 대구로 이동해 어웨이 경기를 치른다. 승리수·합산 득실차 순으로 최종 승격팀을 정하게 되며 원정 다득점 규정은 적용하지 않아 1·2차전 결과에 따라 연장전 또는 승부차기까지..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 시도가 2027년 열리는 하걔세계대학경기대회 성공 개최를 재차 다짐했다. 2027 충청권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창희, 이하 조직위)는 27일 대전 호텔 ICC 크리스탈볼룸에서 2024년 제2차 위원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는 지난 3월 강 위원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처음 개최된 것이다. 행사에는 대전시 세종시 충남도 충북도 등 충청권 4개 시도 부지사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시도 체육회장, 시도의회 의장 등이 참석했다. 강 위원장과 조직위원회 위원이 공식적으로 첫..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첫 눈 맞으며 출근 첫 눈 맞으며 출근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