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기 편집부국장 |
'귀성길은 고생길'임에도 사람들은 명절이면 고향이나 부모, 가족품을 찾아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명절이 주는 소중함 때문이다. 명절은 떨어져 있던 가족과 친지간에 안부를 확인하고 덕담을 나누며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해 준다. 그렇기에 추위와 길 막히는 고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향길과 처갓집, 혈육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일 게다.
그렇지만 시대의 변화따라 명절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설날 끝무렵 만난 지인들의 경험담을 듣노라면 명절 세태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명절의 뒷모습에 숨어있는 불편한 사실을 확인하다보면 씁쓸한 마음마저 든다. 많은 지인들은 명절때 친지들 소식 접하기가 가장 겁난다고 말한다. 모처럼 만난 친지의 안부 묻기도 조심스럽단다. 이혼 급증에서 오는 가족단절의 슬픈 현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자손으로 과거 함께 조상님의 차례를 지내오던 4촌과 6촌, 조카 등 친척 중에서 이혼자들이 생기면서 자격지심탓인 지, 귀성 발길을 끊거나 접촉을 꺼려해 얼굴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결혼 3쌍 가운데 1쌍이 이혼한다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명절에도 그대로 투영되는 셈이다.
명절때 부모와 자식, 혈육간에 오순도순 지내는 가족들이 많지만 냉랭함이 감도는 집안도 있기 마련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고부간 갈등, 시댁식구와 며느리사이, 며느리 동서지간에도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집안도 있다. 이들에게 명절은 불편한 행사일 뿐이다. 거기에 낀 집안 남정네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스트레스가 쌓여간다.
명절은 많은 여성들에게 명절증후군이라는 신종 병을 앓게 한다. 명절증후군은 며느리들이 명절 동안 육체적 피로와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겪게 되는 두통, 어지러움, 위장장애, 우울증 등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고부갈등 등 가족 구성원간에 겪는 스트레스로도 해석된다. 명절 증후군은 비단 며느리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며느리와 자식 눈치를 봐야하는 시부모들도 명절증후군을 앓는다. 특히 1970년 이전에 결혼한 70대 이상의 시어머니들은 어찌보면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겪으며 살아온 마지막 세대나 다름없다. 당신들의 인생은 시부모 받들며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정작 당신들의 시대변화로 며느리와 자식들에게는 똑같은 대접을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낀세대들이다. 당신들의 삶 자체는 희생만 요구당했을 수 있지만 현대에 맞는 고부관계를 정립한 사회변화를 이끈 분들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명절은 자식을 향한 내리사랑과 집안의 평안을 위해 가슴에 한(恨)을 묻고 보내야 하는 의식일 지도 모른다.
명절증후군은 남편들도 피해가지 않는다. 식구들과 아내사이에서 골치아파하고 있다. 명절의 본래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여자만 죽도록 일하는 날'이라면 남편들도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명절의 뒤끝이 좋지 않으면 가족갈등과 부부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모님댁 대문을 나서는 순간 부부싸움이 시작돼 귀가하는 도중 길가에 차를 대놓고 대판 싸우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명절이 끝난 뒤 법원에 이혼신청이 늘고 있다는 것은 곱씹어 볼 일이다.
명절증후군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 까? 이에대해 가톨릭대 정신과 채정호 교수는 한국의 명절이 가족 간에 잠재됐던 '관계'의 문제를 한꺼번에 드러내는 시기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명절에 부부 사이의 작은 문제뿐만 아니라 대가족이 짊어지고 있는 갈등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또 명절에 가족·친척끼리 모이면 비교를 많이 당해 감정적으로 힘들어 지고 여기에 명절은 신체적 변화를 초래해 몸이 지치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약해져 명절증후군을 겪게 된다고 지적한다.
명절이 가족간에 고통이 아닌 화합을 이끄는 즐거운 행사가 되려면 가족 구성원간에 명절증후군부터 예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게 명절증후군을 막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사람 때문에 마음에 한번 상처가 생기면 상대방이 아무리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로 용서를 구해도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 추석명절부터는 이같은 명절증후군 예방법을 다 함께 실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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