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지금의 경상도 문경 땅에서 태어나 신라의 변방비장으로 있던 중 진성여왕의 실정을 틈타 지금의 광주 땅인 무진주를 점령하고, 다시 지금의 전주 땅인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일으킨 인물이 우리가 아는 견훤이다. 신라에는 시종 적대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고려 왕건과는 때에 따라 화친을 맺을 정도로 외치에도 밝아 한때는 후삼국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건 군대를 공산전투에서 궤멸시키는 등 빼어난 성과를 거둔 바 있으나 말로는 비참했다. 호족을 도외시한 채 철권통치를 강행한 결과 내분에 휩싸여 자식도 잃고 나라도 잃고 목숨도 잃은 인물이 견훤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견훤의 출생담에 지렁이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평범하지가 않다. 주인공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라면 비범성을 수반하는 것이 상례인데, 견훤과 같은 영웅의 소종래가 담장 밑의 지렁이였다는 사실에 부닥치고 보니 뭔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이제는 이 방면 연구자들이 노력한 결과 그것이 야래자설화라고 하는 우리나라 광포설화에 포함된 한 화소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일반적으로는 지렁이보다 뱀이 더 많이 등장하며 그래서 그것이 보다 원형에 가깝다는 연구성과까지 나와 있다.
이와 비슷한 출생담의 주인공으로 서동을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서울의 남지라고 하는 못가에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다가 그 못에 사는 용과 상관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한다. 그것이 서동의 출생담이다. 서동은 그 노래 덕분에 적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부자가 되었고 또 나중에 인심까지 얻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백제의 무왕이다. 이 이야기도 삼국유사 기이편에 수록되어 있다. 연원을 함께 하는 두 이야기가 한 곳에 그것도 앞뒤에 실려 전해지고 있는데도 부계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뱀이 용으로 격상된 것이 서동의 출생담이고 뱀이 지렁이로 격하된 것이 견훤의 출생담이다.
견훤에 대한 격하가 언제 생겨나고 어느 계기로 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것은, 국가 간 경쟁의 와중에서 적국의 수뇌를 향한 흠집내기 혹은 대대적인 비하 운동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으로 보면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 망국의 군주에 대하여 유민들이 내린 냉정한 평가의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들의 손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고 적국에 투탁하였다가 울화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견훤의 말로는 적어도 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새해는 용의 해다. 총선과 대선을 치르는 용의 해에는 용과 같은 인물을 뽑아야지 지렁이 같은 인물을 뽑아서는 안 된다. 어느 고명한 스님이 대통령을 겨냥하여 '서이독경(鼠耳讀經)'이라는 부제를 붙인 책을 출간했다고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책을 사서 읽어볼 마음은 전연 없으나 일이 이쯤 되면 대통령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태산이 우르릉 쿵쾅하더니 쥐 한 마리 쪼르르 나오더라는 옛말을 듣지 않도록 임기 말년인 그 분도 자신의 말로를 생각해 정신을 차려야겠지만, 쥐나 지렁이가 아닌 용과 같은 인물을 뽑아야 할 책임이 있는 만큼 국민들도 내년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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