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5월 14일 중도일보 갈마동 사옥 기공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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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특징이라 할 세습 그 자체였다. 그는 머리회전이 빠른 반면 개성이 강해 부친과 자주 의견을 달리해서 참모들이 애를 먹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세대 간의 충돌(견해차이) 같은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우선 신문제작의 사령탑이라 할 편집국장, 주필 자리를 놓고 부자간에 꽤나 신경전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온다.
여기서 회장은 필자를 편집국장 겸 주필로 내세우자 아들(기획실장)은 따로 의중에 둔 인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편집국장을 맡으라는 회장 말씀에 필자는 완곡하게 고사를 했다. 편집국장은 젊고 부지런한 인물이어야 한다며 논설실을 희망했다.
화려한(?) 건 편집국이지만 사설과 칼럼, 기행문을 주무르는 게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여러 해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얻은 것은 당뇨병이었습니다.” 이는 겸양이 아니라 진심에서 한 말이었다. 조금은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자 “시작도 하기 전에 편한 보직 타령인가?” 언짢은 표정을 짓는 회장….
하지만 회장의 명대로 필자는 편집국장과 주필을 겸한 꼴이 되어버렸다. 복간 때 참여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경암빌딩시대(옛 중도)' 출신으론 이혜태, 성기훈, 신한철, 필자 등이고 대전일보에서 건너온 사람은 변평섭, 송형섭, 김교성, 맹주석, 윤충원과 서울에서 백일진이 참여하고 나머지는 공채였다.
이때 입사한 1기생은 현재 중도일보 핵심인물들로 중도일보를 이끌어가고 있다. 복간 후 2년여 동안 필자는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을 오가며 사설과 칼럼을 쓰고 기자들을 통솔하는 나날을 보냈다.
당시 논설위원으론 서울대를 나와 30대에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낸 박동섭, 성기조(국제펜클럽 한국본부장·시인), 송병호(서울신문논설위원·경제부장 출신)가 참여했다. 이렇게 1988년 9월 1일 중도일보는 보란 듯이 닻을 올렸다. 그것은 유폐를 딛고 일어나 부활하는 몸짓이며 새 시대를 여는 종소리이기도 했다.
복간호를 들춰보면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3부요인과 각계인사의 축사와 독자들의 환호가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때 지면구성과 필진선정에 있어 필자는 꽤나 신경을 썼다. 남북관계좌담, 『순교자』로 유명한 재미작가 김은국과의 인터뷰(국제PEN 88서울대회 유치 때 스위스에서 필자와 같이 활약) 당시 미수교국 중공을 들여다보는 기사도 실었다.
지방지로선 파격적인 지면구성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수교가 없는 관계로 홍콩 특파원 박병석(현 국회의원)을 통해 잠자는 대륙의 사자, 중공을 들여다보는 기사도 다뤘다. 9월 1일부터 이렇듯 중도일보와 대전일보는 양 축을 이루며 또 다시 경쟁관계에 돌입한다. 필자 개인입장에서도 88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중도일보 복간에 참여했다는 긍지와 88세계PEN서울대회를 유치한 보람에 가슴이 설?다. 한국PEN대표로 스위스 루가노 세계대회에 참가, 서울대회(올림픽에 맞춰)를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그때 한국대표로는 전숙희, 정한모, 조병화, 이현복, 방곤, 최정호, 필자 등이 북한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이를 해냈다. 그때 북한 공작원들은 호텔을 누비며 서울올림픽과 PEN서울대회를 방해하고 나섰다. 그것을 물리치고 우리 일행은 해낸 것이다. 그 내용은 이미 필자가 신문과 '신동아'에 써낸 일이 있다.
▲ 1988년 중도일보 속간 1호 발행 모습. |
12층짜리 경암빌딩을 놔두고 갈마동 자신의 땅에 12층짜리 사옥을 신축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전일보 사옥이다. 주변에선 남씨와 이씨 사이엔 전생에 악연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73년 통폐합 때 당하더니 갈마동 신사옥마저 대전일보에 넘어갔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본궤도로 화제를 끌어들이자. 복간 초 사원들 사기는 충천했다. 필자 역시 지면장식(제작)에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평소 교분이 있는 명사들로 하여금 칼럼을 쓰게 했다.
예를 들면 저 유명한 박찬종(대통령 출마자), 한승헌(감사원장), 문덕수(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예술원회원), 성기조(시인, 국제PEN클럽 한국회장), 전철환(한은총재) 등의 글을 실었다. 박찬종은 중도일보에 가서 강연을 하라면 종일이라도 하겠는데 칼럼 독촉을 받으면 소화가 안된다고 엄살을 떨기도 했다.
누군가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승헌, 문덕수 등은 동아, 조선의 고정 필진인데 중도일보 필진이라니?” 한 때 그런 평이 나돌았다. 당시 필자도 지면장식을 위해 뛰어다녔다.
일본의 정치지도자(총리)와 도쿄대 사토(정치학) 교수와 가모 교수, 일본 속의 백제문화(기행문), 인도기행에선 생시의 테레사수녀의 인터뷰 그리고 간디와 네루의 정치철학, 인도인의 종교관, 타고르의 문학세계 등을 연재한 바 있다. 그리고 일본의 도요(도자기) 순례 등을 실었다. 되돌아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복간과 동시에 중도일보에선 문화사업을 폭넓게 펼쳤다. 지난날의 지역사회개발은 거의 매듭지은 상황이고 보니 시대가 변한 만큼 신문사의 사업도 달라져야 한다는데 뜻을 모아 '일본 속의 백제문화' 기행단을 구성, 안내를 했다.
뿐만 아니다. 지방자치시대에 대비, 지방의원 희망자를 위한 교육(세미나)도 마련,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제발표는 김용래(서울시장, 총무처장관), 이계희(충남대 교수)와 필자가 맡았다. 여기서 필자는 스위스기행에서 얻은 '지방은 크고 중앙은 작은 나라' 그 현황을 소개한 바 있다.
이렇듯 순풍에 돛을 단 듯 잘나가고 있었지만 그 당시 이 회장은 후계(세습)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회장부인이 더욱 서두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기창이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과도기를 이끌어 갈 사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장 물색을 하는데 네 사람을 놓고 타진해온 것으로 짐작한다.
① 이기백, 그는 5공 때 국방장관을 지낸 4성 장군으로 이 회장의 조카로 1순위였으나 그는 마다했다. 군인은 군인으로 시작, 군인으로 끝나는 게 순리라며 전두환 대통령의 권유마저 뿌리치고 끝내 정계진출을 접었다.
② 심상기= 부여 출신으로 중앙일보 편집국장 시절 필자와 같이 한국편집인협회 부회장을 지낸 강직한 인물이다. 당시 우먼파워(잡지)의 발행인으로 그 후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바 있다.
③ 박동섭=대전고교와 서울대(경제학)를 나와 조순과 러닝메이트로 재무장관 물방에 올랐던 경제통. 연기 출신으로 은행동 소청 1번가 일대 빌딩재벌로 유명했다. 그는 건강을 이유로 한 때 논설위원으로 경제사설을 썼다.
④ 임철규=대전고와 연세대를 나와 한국일보 정치부기자, 연합통신 국장을 지낸 재사로 JP(동향)와는 등을 돌리고 동양통신 사장과 공화당의 실세 김성곤의 측근으로 활약해왔다. 세 사람이 모두 고사하자 임철규가 사장으로 부임했다. 이기창의 대전고교와 연세대 선배라 해서 기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웅렬 회장 별세=임철규 사장은 능변에다 순발력을 지닌 서울깍쟁이 인상을 풍기며 부임하자마자 살생부((殺生簿) 설을 흘렸다. 그 대상은 1호가 편집국장 안영진, 2호 이혜태 전무, 3호는 광고국장 서모라는 소문이었다.
구조조정이나 세대교체는 시대적 흐름이며 조직사회의 '룰'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엉뚱하게 대전여고 동창회에서 흘러나왔다. 임 사장이 부임하자 대전여고 동창회에선 임사장 부인을 회장으로 추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중도일보 간부 살생부 내용을 흘린 것이다.
그 바람에 사장과 필자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다 한 번은 삿대질까지 하며 몸싸움 직전까지 간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잘 보좌할 걸…”하고 후회가 된다. 또 있다. 이혜태 부사장이 사장을 희망할 때 필자가 바른 말을 한 게 평생 동지와 등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잉투자로 월급이 밀리자 회장은 우리 두 사람에게 SOS를 친 일이 있다. 필자는 재력이 없지만 이혜태는 회장 다음가는 재력가인데 그는 호응하는 기미가 없었다. 기억 정도는 수시로 변동할 수 있지만 “밀어 넣으면 받을 것 같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그럼 사장 꿈을 접어라”라고 한 게 화근이 되어 지금도 그는 필자를 외면한다. 필자의 생각은 이러했다. 투자나 변통은 위험해서 못하고 사장직을 생각한다면 이는 과욕이라는 필자 판단이 잘못된 것인가? 어떻든 지나간 이야기다.
지금 그는 와병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쾌유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떻든 그는 중도일보의 1등 공신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사요, 조직사회의 생리인 것을…. 이 와중에 이웅렬 회장이 별세했다. (19○○년 ○월○일)
이후 이기창은 신문사를 이끌다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의 가문은 몰락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웅렬 회장은 영원한 신문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과잉투자와 '경암빌딩 시대' 사무착오로 인한 국세청의 추징압력과 운영미숙에 IMF사태까지 겹쳐 좌초를 했다.
▲김원식 사장의 등장=이기창 사장이 퇴장하자 한 때 중도일보의 간판이 흔들리는 판에 김원식 사장이 인수, '오류동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시설, 환경, 운영형태 모두에 있어 나무랄 데 없는 여건 속에서 항진 중이다. 그리고 신문제작에 관여하질 않는다 해서 호평을 받고 있다.
신문이 난립하고 방송매체가 기승을 부리는 세상이라지만 그렇다고 활자매체가 퇴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21세기 중도일보는 충청인의 반려로 또는 대변자로 더욱 번영하길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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