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그래서였을까. 며칠 전 뉴스에서 본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화마에 장애인인 아들을 쓸려 보내고 자책으로 몸을 떠는 어느 아버지의 눈물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했을 때, 내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돈을 아끼기 위해 가스버너를 틀어놓고 생활해야만 했던 그들을 우리는, 그리고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에너지 소외계층, 굳이 이름은 붙이자면 그들은 그랬다.
하지만 우리의 이웃인 그들에서 우리는 에너지만을 소외시켰던 것인가. 아니다.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기댈 곳이 작은 가스불이 전부였던 그들의 삶은 우리가 당연한 듯이 누리는 거의 모든 것들에서부터 외면을 당해왔을 것이다. 삶이 아무리 괴로운 것이라지만 이런 것은 삶의 당연한 일면으로 보기엔 너무 안타깝고 잔인한 일이다. 그들을 외면했던 것은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에너지를 가진 우리들이다. 에너지소외계층을 위한 지원금정책이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기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을 때 나는 나의 무력함을, 시절의 무력함을 느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죄인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를 탓하겠냐며 고개를 숙였을 때 나의 고개도 저절로 숙여졌다.
시절의 촌극이다. 아무리 시대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고 밥 못 먹는 사람 없다는 듯 풍요의 맨살을 보여주고 있다지만, 시대의 한편에서는 여전히 가난을 섭식하며 비좁은 쪽방에서 가스버너에 몸을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절은 크리스마스와 송년을, 그리고 실체도 없는 새해를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새로운 해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보는 해는 어제의 해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살갗에 와 닿는 시절은 실상 매번 똑같은 것이다. 시절을 소비하지 말라. 매 순간 변하는 온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절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라. 나는,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비극을 너무 멀리서 관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서 먼 일이라 치부하고,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그 비극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비극에 거리를 두려한다. 하지만 비극은 그렇게 맞이하면 안 된다. 비극의 틈새마다 켜켜이 쌓인 어두운 먼지들을 손길로 쓸어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모두 나의 풍요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죄의식도 품어봄직 하다.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들만의 풍요, 외롭게 단단한 '당신들의 천국'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물어봐야 한다.
시절은 개인에게 그러한 죄의식에 면죄부를 준다. 일한만큼 성과가 얻어지는 자본주의 세상이다. 가난한 이들은 열심히 살지 않아 가난한 것이니 동정도 관심도 필요 없다는 천민자본주의의 중심에서 그 면죄부를 받아든 개인은 거리낌이 없다. 백화점 명품관엔 지금 이 시간에도 줄을 서서 가죽가방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소비와 향락의 밤은 시절과 함께 깊어질 것이다. 뉴스 화면을 통해서 본 화마의 뒷모습은 죽음처럼 시꺼멓게 그을려 플래시 불빛에 번쩍번쩍 윤이 나고 있었다. 계절에, 소외된 이웃에 귀를 기울여라. 난방으로 뜨거워진 방바닥 위에 앉은 나의 비대한 내부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는 듯 했다.
계절이 지나가면 그만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눈이 내리면 내리는 대로, 한파가 몰아치면 몰아치는 대로 시시각각 괴로워질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 비로소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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