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수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두리한의원장 |
아이들은 눈구덩이 속에서도 깔깔거리며 놀고,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무릎에서 찬바람이 나온다고 하시지 않은가? 그게 다 양기가 있고 없고 차이일세. 요즘은 양기란 말이 남정네 정력으로만 쓰이는 듯해서 다소 민망한 말이 됐네만, 한의학에서는 음기와 더불어 생명력의 다른 표현일세. 양기가 점점 쇠해지면 정력도 당연히 달리게 되긴 하네만, 실은 목숨이 사위는 것이지. 자연법칙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가는 세월 막자고 가시로 치고 지팡이로 막았더니 백발이 저 먼저 알고 질러오더란 옛사람의 탄식이 요즘 내 마음일세.
지난 토요일 대전역 광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네. 우리가 함께 보았던 노란 나트륨등과 비둘기호에서 내리는 이웃들의 가난한 어깨는 눈에 띄지 않았네. 대신 KTX를 타고 오는 바쁜 현대인들의 서두르는 발걸음만 분주하더군. 거기서 무엇을 했느냐고? 한·미FTA 비준무효 반대집회에 나갔다네. 100여 명 남짓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고, 두 시간을 넘기지 않은 집회 내내 겨울바람이 매섭더만.
우스갯소리네만 1992년에 한의원을 개업한다고 선배들께 인사를 다닐 때 들은 이야길세. 왜 이제야 개업을 하느냐고, 좀 일찍 하지, 요새는 영 경기가 좋질 않다고. 그런데 말야, 내 기억으로는 그 이후로 경기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으이. 좋기는커녕 점점 살기가 팍팍해서 어려운 이웃은 더 많이 늘어나고 있지 않나.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는 청춘 둘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일세. 그런 비정규직이 십 수 년 사이에 800만을 넘었네. 내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남과 경쟁에서 양보하라고 말하기가 몹시도 어려운 세상일세.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희망이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일세.
한·미FTA 때문에 이익을 볼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말일세,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게 한·미FTA는 지금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네. 한 가지 예만 들지.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는 세계적으로 봐도 꽤 괜찮은 제도야. 이 정도 보험료로 이 정도 보장을 해주는 나라가 많질 않다네. 그런데 한·미FTA가 체결되고 미국 자본이 돈을 대는 영리병원이 들어서면, 바로 이 건강보험의 근간이 뒤흔들리게 될 걸세. 영리병원은 민간의료보험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지금 국가가 예외 없이 건강보험을 적용하라고 병원에게 강제하고 있는 당연지정제가 흔들리게 된다네. 영리병원에선 건강보험에서 주는 수가를 받아서는 흑자를 내기가 어렵거든. 좋은 시설과 이름 높은 의사들을 운동선수 뽑듯 스카우트 해가고, 대신 높은 비용을 부담시키겠지. 이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인 국민들에게 돌아갈테고.
이런 영리병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건강보험은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네. 한의사인 나야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병원에 주는 돈이 많을수록 좋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모자라는 건강보험료에서 병원에 나가는 돈이 많으면 어찌 되겠는가. 이 부담이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돈 많은 사람들이야 민간의료보험으로 비싸고 좋은 영리병원 이용할 수 있으면 좋을지도 모르겠지. 지금처럼 3시간 기다려서 3분 진료 받는 일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건강보험이 없어져서 제때 치료조차 받기가 어려워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아닌가?
춥네. 마음만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길 바라며, 겨울바람 부는 대전역에서 친구가 몹시 보고 싶었네. 언제고 눈 오는 날, 머리에 소복이 눈을 쌓고 사부작사부작 대포 한 잔 하러 가세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