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군부의 언론관=유신초기에 신문 '1도1사' 강제통폐합 때 중도일보가 문을 닫자 대전일보의 독주시대가 열린다. 당시 사주는 변호사회 회장이며 충남에서 손꼽는 재벌 남정섭씨였다. 이때 장남 남재두씨가 가업을 잇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는 경기고와 연세대를 나온 엘리트로 한국은행 조사역직을 접고 부친의 뜻에 따라 기획관리실장을 맡았다. 차분한 성품에 청순한 이미지를 앞세우며 운영에 임했다. 그는 부임 초 사원들 앞에서 약속을 했다.
①사원의 급료 인상은 물론 국장급 보수는 국영기업체 임원수준으로 올리고 ②일등신문(지방지)을 만들 것이며 ③사원의 복지복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약속대로 월급을 올려주며 그것을 직접 가정으로 송금을 했고 자녀들의 학비(고등학교)지원을 제도화시켰다.
신문, 잡지가 난립할 때가 아니어서 기자들은 일상 어깨를 펴고 다녔다. 7년간 순풍에 돛을 단 듯 대전일보는 부산일보, 대구매일과 함께 춘추사 선두그룹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1980년 군사정권의 언론장악 공작이 시작된다. 중앙지의 주재기자를 없애고 지방지까지 기자숙청(학살)을 단행했다.
문공부에는 신문사마다 담당관을 배치, 감시를 하고 기관원이 일상 신문을 감시했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한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필자가 편집국장 시절 군 기관에 수없이 불려가 시달림을 받았다. 지금은 '북한'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북괴'로 표기할 때였다.
1면 기사에 '남괴'라 오식을 했다. 그때는 공장에서 문선공이 활자를 하나하나 뽑아 조판을 할 때였다. 활자배열이 '동서남북'하는 식으로 되었기 때문에 북자 위의 남자를 뽑은 게 문제를 불러들였다. '남괴 사건' 직후 이번엔 '전 대통령'이 '全 大領'으로 나와 불려간데 이어 또 한 번은 '대통령'이 '대령통'으로 나와 말썽을 빚었다.
또 '全大統領' 취임 때 '金大統領'으로 나가 신문방송차량을 불러들이고 다시 찍는 소동도 있었다. 필자가 JP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라며 몰아세웠다. 연 이은 실수에 군 수사기관에선 신문사 내부에 고첩(고정간첩)이 있다며 호통을 쳤다. 암울했던 그 시대 언론탄압사례는 이루 다 열거할 재간이 없다.
한 번은 선글라스에 권총을 찬 중령이 찾아와 봉투를 내밀며 이를 처리하라고 명령조로 나왔다. 사령관님(중장)께서 직접 쓰신 시(詩)라고 했다. 사령관이 시인이냐고 묻자 어떻든 이 시를 신년호 1면 머리에 올리라는 것이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그렇게 알고 사령관님께 보고 하겠다며 일어서려는 걸 “이쪽 이야기도 들어야 할 것 아니오!” 하자 이의가 있느냐며 눈 꼬리가 이마로 올라붙는다. “이보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밤중에 봉창 뜯는 소릴!”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 식으로 사령관님의 명령이라며 되레 큰소리를 친다.
이에 질세라 필자도 언성을 높였다. “좋습니다. 명령대로 하죠! 신년호 1면 머리는 전국신문이 대통령 부처사진을 싣는 게 관례지만 사령관의 시를 머리에 싣고 대통령 부처 사진을 그 밑으로 깔겠다”고 하자 순간 얼굴빛이 변했다. 그 사령관은 그 후 4성 장군으로 승진, 지휘봉을 쥔 인물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남재두 의원은 정치에 전념, 신문사에는 2~3개월에 한번 쯤 들를 뿐 사장과 측근에게 모두를 맡기고 있었다. 자신의 회사지만 정치와 언론의 분리를 실천하려 했던 모양이다. 한 때 그는 정계에서도 '엘리트 의원'으로 통했다. 정치인 모두가 그와 같다면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은 안 되었을 것이라는 여론이 나돌기도 했다.
▲나의 15년간 대전일보 시절=필자는 일평생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탓에 지금도 '노기자' 행세를 하고 있다. 남이 뭐라 하던 녹슨 펜으로 신문잡지에 잡문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니 70~80년대 격동기 <그때 그 현장>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보와 실수 거기에 수모의 연속이었다. 배우고 익히며 좌절하지 않고 뛰었으나 갖춘 것이 없고 친화력을 지니지 못한 체질 탓에 늘 눈에 박힌 가시로 비쳤을 것이다. 80년대 대전일보 편집국장, 주필시절 이야기다.
①박대통령 서거 후 국회가 주최한 헌법개정공청회 때 여야 법사위원 전원과 학자, 지식인 앞에서 주제발표를 한 일이 있다. 장기집권이 불러온 불행임으로 앞으로는 '단임' 또는 '이원집정제'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주장해 '별난 놈' 소리를 들었고 ②민정당 공청회에선 경제성장 즉,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천부의 권리인 사유사색, 학문연구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가시 돋친 말을 했다가 문제아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③국회지역감정해소위원회 공청회에선 영호남 사람들의 장단점을 열거 험구, 독설가라는 뒷말을 들었으며 ④독립기념관 주최 세미나에선 중앙청(총독부건물)은 허물지 말고 독립기념관 명칭은 '민족박물관' 또는 '한민족 박물관' 쯤으로 개칭하라고 주장한 일도 있다. ⑤대전일보 - 일본신문(熊日)과의 국제학술세미나를 주도, 1회는 대전, 2회는 일본에서 주최했는데 칭찬은 커녕 모함을 받아 눈물을 흘린 일도 있다.
그리고 공주-기쿠스이(菊水) 간의 자매와 충남도-구마모토 간 자매를 주도하고도 온갖 모함을 받았다. 주변에서 '너무 튄다', '설친다', '제 앞도 못가리는 주제에…'라고.
하지만 사주 남재두 의원은 오히려 격려를 하는데 대리인 격인 한 두 간부는 그게 아니었다. 심지어 “이 새끼야! 중도에서 넘어온 놈이 편집국장, 주필, 꽃방석을 깔고 앉아! 나가줘야 우리도 해먹을 것 아니야?” 이런 식이었다. 그러더니 사규(조례)를 고치는 게 아니던가. 필자가 54세 때 일이다.
같은 연령인 논설위원이 “중앙지도 65세 정년이고 타 지방신문도 이에 준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 신문만 55세라니 말이 안 된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그는 밀려났다. 필자와 동갑내기로 그는 국립지방대 교수출신이었다. 필자가 살아남은 것은 사주의 배려 때문이었다. 어떻든 나의 대전일보 15년 그 애환을 신문 또는 잡지에 소상하게 다뤄볼 생각이다.
▲88년 9월 1일 중도일보 복간 전야=70년대부터 88년 복간까지 이 고장에는 변변한 잡지 하나가 없었다. 대전일보를 떠나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문예지'를 발간할 생각으로 서울의 명사와 충남지사를 찾아가 간청, 1200만원을 확보했다.
▲ 중도일보 복간을 알리는 선도지를 보고 있는 노일들. |
그 바람에 문예지는 빛을 보지 못했고 그 예산으로 '아시아작가대회'를 대전에서 개최했다. 아시아 작가협회 조직위원장(집행)을 맡은 필자는 8월 중순에 이를 치러냈다. 중도일보 복간이 9월 1일이었으니 그때 허둥대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마에 식은땀이 난다.
신문복간 일자가 다가오자 이웅렬 회장은 필자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데 국제행사까지 겹쳐 필자는 서리 맞은 소채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 바람에 작가대회에 나와 축사를 한 이원설 한남대 총장, 이성근 배재대 총장에게 차대접도 못하는 결례를 범했다.
그들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바람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 공교롭게 일본TV 이즈노 기자가 촬영팀을 이끌고 대전에 왔다. 그는 필자가 일본에 갈 때 마다 도와줬던 민완기자였다. 또 있다. 저 유명한 도공 '사츠마 도요', 심수관의 관향 '청송'(임진란 때 남원에서 피랍)과 '우록동'을 촬영하러온 것이다.
원래는 필자가 안내하기로 했는데 신문복간 때문에 대구매일 안덕환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 사정을 설명하고 안내를 부탁하자 그는 일본어가 서툴러 대리안내를 내세우겠다고 나왔다. 이즈노 일행은 이틀간 촬영을 마치고 대구 술집에서 한잔을 하던 중 여자 PD가 술에 취해 바람을 쏘이려 밖으로 나갔다가 그만 길가에 쓰러졌다.
헌데, 눈을 떠보니 호텔이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일행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밤샘하며 가슴을 졸였다고 한다. 그러니 필자는 더욱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즈노 기자는 공주-기쿠스이 간의 자매결연 때 필자와 일본TV 간의 인터뷰를 주선한 장본인이다.
필자는 대전에 앉아 전화를 통해 회견을 했다. 수화기를 통해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바로 이분입니다. 한국의 대전일보 주필 안영진씨…. 자매결연을 주도한 이분으로부터 그곳 공주의 분위기를 위성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필자는 약 3분간 그 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것이 70년도 중반의 일이고 보면 당시로선 일대사건이었다.
▲ 1988년 9월 1일 속간호. |
이인구 회장도 신문을 생각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에 조만간 그를 만날 생각이라며 “나는 한(恨)이 있는 사람 아닌가?” 이인구씨는 젊었고 패기 있는 사람이니 차라리 정계에 나가라고 권할 생각이라고 했다. “어떻든 나 좀 도와주게” 하시기에 “저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시지요?”라는 말에 “암! 주고말고”하시며 자리를 떴다. 1주일이 지났을까 또 지팡이를 짚고 찾아오셨다. “뜻을 굳혔는가?”하시기에 “남 의원을 아직 못 뵈었습니다”하자 “자네도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필자의 아픈 곳을 슬쩍 건드린다.
순간 자리를 비켜줘야 대전일보 토박이도 해먹을 게 아니냐며 때없이 '놈'자를 써가며 밀어붙이던 어느 중역 얼굴이 순간 머리를 스쳐갔다. 이틀 후인가 사표를 내자 사장은 “남 의원이 평소 국장을 아꼈는데…”하며 고개를 돌린다. 사표를 들고 이번엔 총무 앞에 내밀자 역시 거절을 한다. 며칠 뒤 사표를 총무 이사에게 내밀고 돌아왔다. 만 15년, 나의 대전일보 시절의 애환(일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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