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질주의 시대인 지금 '인문학이 죽었다'는 선고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수행을 막 끝내고 숲을 떠나던 차라투스트라가 '신은 죽었다'고 한 것처럼, '인문학의 죽음'은 당연한 시대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도나도 인문학의 무용론을 말하는 와중에 홀로 인문학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왠지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에서 시작한 인문학의 종말론은 정말로 인문학을 고사시켜 가고 있다.
대학에서 기초학문이 응용학문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대학은 기초학문의 요람으로서 학생들에게 삶의 방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중요한 일일 텐데, 취업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적인 역할이 강조되면서 자연히 기초학문인 인문학의 위상도 동반 추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기초학문에 집중하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취업을 위한 응용학문에 매진하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교수로서, 대학 경영자로서의 이러한 고민은 제자들 모르게 앓고 있는 불면의 원인이다. 나라의 교육정책을 탓하거나 작금의 시대적 세태를 탓하는 일이 이 의문의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학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의 와중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 10일, 모 일간지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수능시험을 치러야 할 학생들이 고사장으로 향하지 않고 거리로 향해 '우리는 대입을 반대한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그 대학에 들어가서 취업을 하기 위해 대학입시보다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는 것. 그 모두가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는 벅찬 일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용기에 동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어린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저러는가 하는 모순적인 감정이 솟았다. 그리고 그 생각에 이르러 황급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풀썩하고 맥없이 스러지는 신문지처럼 내 마음도 착잡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이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러한 시대이기에 더욱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누워있는 인문학을 향해 일어나라 말해 주고 싶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의 학생들에게 인문학의 품으로 뛰어들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은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넓은 배움의 터'가 되어야 한다. 학문은 죽지 않는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새로운 학문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하더라도 기초학문 자체를 말살한다면, 새로운 학문도 제대로 터를 잡을 수 없다. 새롭게 생긴 학문의 자리도 인문학의 기반에서 다듬어야 올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대학들은 취업률을 강조하는 정부정책에 부합한다는 취지에서 기존 학문들의 기반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새로운 학문을 설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학은 새로운 학문을 도입할 때 짧은 호흡보다는 긴 호흡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 숨쉬기가 곤란하다고 짧은 호흡만 거듭하다보면 급기야는 숨 쉴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인문학은 무엇보다 우리네 삶을 위한 학문이다. 인문학이 무너진다는 것은 삶의 기본적 요건들이 무너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필경 인문학의 무용론은 우리 삶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 피상적인 현실에 모든 시선을 빼앗겨 버린 탓일 게다. 이제 우리는 효율적인 목적성을 넘어서서 삶의 본질인 인문학을 생각해야 할 때다. 인문학이 홀로 설수 없다면, 여러 학문과 어울리며 그 근본을 유지하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학문융합일 것이다. 학문융합은 학문간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상생의 길이다. 깊어가는 가을, 인문학의 발전방향을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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