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위원 |
여기서 반딧불 수백만 마리가 외부 지휘 없이도 어둠 속에서 일제히 깜빡이는 것과 맞먹는 행동의 동기화를 이룬 수단은 라디오였다. 상상력 면에서 라디오만한 영화 없고 책만한 라디오 없다더니 그 격이 됐다. 버글스가 부른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가 아니라, 변방의 라디오가 팟캐스트(아이팟+방송)를 통해 부활했다. 올드미디어 라디오가 2000만 스마트폰 시대에 뉴미디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스마트폰의 힘만은 아니다. 온갖 사물이 공정해 편파가 없다면 이 난감한 사설(私設) 방송은 주목받지 못했다. “나꼼수 좋아하세요?” 이 질문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작업용 멘트가 생각난다. 동명의 책이 영화화됐을 때 브람스가 누구냐고 묻는 미국인들의 귀찮은 성화에 제목이 '굿바이 어게인(Goodbye again)'으로 바뀌었다. 나꼼수 선호도로 누군가를 평가한다면 이는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로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아둔한 짓이다.
▲ '나꼼수' 출연진들. 뉴욕타임스 캡처. |
진행자들은 '모 아니면 도'라는 대중 편승의 법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대중은 무슨 화끈한 비밀 로맨스인 양 귀를 쫑긋 세운다. “저 선수 지금 거의 예능 버라이어티 찍고 있죠. 아까 3루로 공 빠지고….” 싫어하는 정치세력의 실수에는 늘 '편파방송'처럼 말한다.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없다. '말의 근원을 묻지 않는다(不問言根)'는 옛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론기본권이나 신봉한다면 모를까, 이 역시 편파방송이다. 이에 맞선 편파방송이 출현해 라디오정치가 격랑을 이룬다 한들 놀랄 게 못 된다. '꼼수'를 정치적 근대성의 징후, 전략적 합리성의 속된 이름으로 본 것은 아주 잘한 규정이다. 점잖은 엄정 중립은 시선을 맞추지 못한다. 그래서 꼼수다.
그리고 '꼼바르고 쩨쩨한' 꼼수는 언제 어디에나 있다. 19일로 잡혔던 나꼼수 대전 공연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KAIST(카이스트) 대강당을 대관한 적 '있다', '없다'로 후끈 달아올랐다.(본보 9일자 2면 '카이스트 대관 불허 진실 공방') 섹시한 정치적 선정성을 띤 토크쇼라 파장을 걱정해 대관 승인을 안 했어도 그 바람에 나꼼수는 더 널리 알려졌다. 몰랐던 대전·충청 지역민까지 이렇게 물을 것 같다. “나꼼수가 뭐래유?” 정치 엔터테인먼트 오디오 콘텐츠 '나꼼수'의 인기 비결은 혹시 '꼼수' 아닌가.
최충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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