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빌딩시대가 전성기=중도일보 사우들은 지난 1960년대 중반~73년을 경암빌딩시대라 부른다. 그 무렵 기자들은 의욕을 갖고 뛰었다. 보관지를 들춰보면 고동의 현장, 정치 1번지, 충남의 토호열전, 백제문화의 재발견 등의 연재물이 눈에 들어온다. 감회가 새롭다.
▲ 경암빌딩 사옥 전경. |
김갑순에 대한 괴담은 그 후 TV에서도 다룬 바 있다. 총독에게 금명암을 내밀었던 김갑순은 호피(호랑이 가죽)를 진상하고 아들을 판사로 입신시킨 장본인이다. 출장 온 총독부 관리가 보문산이 아름답다고 하자 저 산에는 소나무가 뎃보, 뎃보 서 있다고 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뎃보(銃)란 총을 뜻하는 것인데 그의 일본어 수준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해방 직후 그는 친일파로 몰려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를 잡아 가둔 반민특위 인사가 무슨 사건에 연루, 감옥에 갇히자 그를 찾아가 네놈도 춥지? 나도 그때 굉장히 춥더라! 고 면박을 줬다는 김갑순….
토호열전을 취재하면서 필자는 묘한 점을 발견했다. 토호들은 모두 몰락했지만 그 후예들은 물장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천(목욕탕) 아니면 다방 경영 등…. 어떻든 그 시대 필자는 일을 찾아다녔다. 내세울 게 없는 입장이라 뛰는 수밖에 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훗날 백제700년, 칼럼집 기구(氣球)의 사색, 현해탄은 말한다, 한일협력시대, 동서양의 명사들, 백제는 왜국의 유모였다 등의 저서, 졸작(拙作)을 낸 것도 당시 배우고 느낀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때 모두들 열심히 뛰었다. 김종선, 이지풍, 민병구, 이혜태, 성기훈, 서정의, 조준호, 권오덕, 이재현, 신한철, 윤성한, 안영순, 김춘길, 이용웅 등은 한 시대 이 고장 언론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문화사업을 펼치다=중도일보가 펼쳐온 문화사업을 살펴보면 ① 미인대회(산업미스) ② 영화, 가요제(백마상) ③ 3·1절 기념 전국학생(중, 고)문예공모 ④ 3·1절 기념 마라톤 ⑤ 일본 속의 백제문화순례 ⑥ 청소년 웅변대회가 그것이다.
▲ 제5회 중도일보 영화제에서 배우 도금봉 인터뷰 모습. |
우연한 술자리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문정선이 테스트를 받는 날이었다. 그녀는 굵은 톤으로 노래를 불렀다. 훗날 '보리밭'으로 명성을 날린 장본인이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가면 박춘석과 골목 일식집에서 쨍그랑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박 선생, 요시야(吉屋潤)를 자주 만나시나요? 하자 어쩌다….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길옥윤은 패티김의 남편이다. 그 무렵 중도일보는 지면을 쇄신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동양통신, 시사통신, 합동통신 이외에 해외필진을 활용했다. 하지만 곡절도 많았다.
▲계엄당국의 신문제작 간섭=지역개발의 자문역 나카타니(中谷忠治)의 '한국의 인상'이 계엄당국에 의해 중단된 일도 있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언덕에 올라 울산 시내를 내려다보는데 안내자가 공단 굴뚝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를 가리키며 저걸 보시오! 하고 탄성을 지르는데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이는 구시대의 공장형태라고 지적한다. 1만여 공장이 들어찬 오사카나 세계적인 중공업단지 고쿠라(小倉)에도 검은 연기를 뿜는 굴뚝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강릉에 간 일이 있다. 통조림 공장을 세우는데 경협을 부탁받았다.
한 해 어획량을 나카타니가 묻자 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 동해바다는 고기 반, 물 반이니까요! 이 말에 그는 또 한 번 놀랐다.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벌이면 백전백패를 한다. 어획량과 공장규모 그리고 예산은 얼마, 수출 상대 등을 조밀하게 분석, 투자를 해도 위험이 따르는데 어바우트(About) 얼마라는 식이라면 아예 접으라고 충고한 글이다.
또 있다. 그 자신이 충남도청 근무시(일제 때) 충북 괴산에는 괴산태, 황해도 장단엔 장단태, 충남에는 두렁콩이 유명했는데 퇴화한 것이 안타깝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한국의 나전칠기를 볼 수 없다며 씁쓸해했다. 이렇듯 애정 어린 충고 '한국의 인상'은 계엄사의 압력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독자들의 격려전화도 있었지만 계엄당국의 눈은 더 없이 싸늘했다.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글로 단정, 이를 번역한 필자에겐 계엄업무에 도움이 안 되는 자라는 경고가 뒤따랐다.
한 번은 일본여행에서 돌아온 사장이 자네에겐 이것이 걸맞지하며 가와바타(川端康成)의 노벨상 수상작 '설국'과 요시카와(吉川英治)의 '삼국지'를 내놓았다. 필자는 삼국지를 번역, 이를 연재하다 73년 통폐합 땐 중단하고 말았다.
그 당시의 보관지를 들춰보면 감개가 무량하다. 그리고 신문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자유중국 왕람(王濫)의 소설을 수년 간 실은 적도 있다. 그 인연으로 필자는 89년 자유중국 문인협회장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요즘에는 소설을 싣는 신문이 없지만 그때는 소설 때문에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가 많았다. 신문에 소설을 싣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인데 그 바람에 인기작가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에선 이노우에(井上靖)가 풍도, 태합 히데요시(秀吉)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한국에선 손창섭, 김홍신, 조정래, 이문열, 황석영이 인기를 누렸다.
중도일보에선 이밖에도 백제문화의 재발견, 충청인 그는 누구인가?라는 뿌리 찾기에 앞장서왔다. 거기에는 웃지 못 할 일화도 뒤따랐다. 무령왕릉 개봉 때 김원용(서울대) 박사의 실언이 떠오른다.
왕릉에 선 석수, 지석, 금은 장식품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 현장에서 '박사님, 백제 때는 왕관이 없었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 박사는 '백제에는 왕관이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능 안의 부장품을 모두 끌어내고 청소를 하는 과정에서 왕관 장식이 나왔다.
저 유명한 불꽃무늬 관식(화염문)이 그것이다. 왕관의 천은 삭아 없어지고 금으로 된 관식이 풀뿌리(세근)에 싸여 있는 걸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때 김 박사는 정정합니다. 백제 때도 왕관이 있었습니다. 쑥스러운 표정을 짓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백제문화에 관한한 학자에게만 의존할 일이 아니라며 매스컴의 역할을 주장해 왔다.
▲백제사를 다시 쓰자=백제문화를 폄하하는 근거로는 멸망국의 잔해라 해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대표성을 갖는다는 발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것은 편견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역사가 오래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예가 어디에 있으며 그리스, 로마, 신라도 결국 망했던 나라다.
▲ 부여 삼충사 제1회 백제대제. |
신라가 삼국의 주종(主宗)이고 대표성을 갖는다는 건 편견이며 유아(唯我)주의에 불과하다. 특히 신라권의 백제사 폄하는 도를 넘고 있다. 어느 해던가 전국문화예술인대회 세미나에서 구인환(서울대 교수), 차범석(극작가), 필자가 주제발표를 한 일이 있다.
필자는 백제사를 다시 써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백제권 개발의 부진을 지적하면서 경주권(신라권)은 웅장하기는 하나 졸속개발로 시멘트 냄새가 짙다고 했다. 또 신라문화의 정수라는 석굴암은 신라 독창물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 말썽을 빚었다. 석굴암 중앙에 자리한 대불은 가슴팍이 풍만하고 표정도 근엄해서 이는 신라인의 솜씨다. 그러나 돔 입구 양쪽 기둥은 고구려의 쌍영총 8각기둥을 닮았다. 그 뿐만 아니다. 석굴암 벽에 새긴 시불(侍佛) 중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의 가사는 백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석굴암은 신라 독창물이 아닌 삼국종합작품이라 한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아마추어의 사견이라 전제했는데도 장내에선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남권 인사들이 떼를 지어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라!, 그 발언에 책임을 지라!고 아우성을 친다. 이에 필자도 완강하게 맞섰다. TV토론을 하든가 신문지상에서 토론을 갖자고 받아쳤다. 주변에선 당신 가는 자리는 늘 시끄럽군!하는 것이었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보태자. 89년에 있었던 이야기다. 영호남이 한창 갈등을 빚을 때 국회에선 지역감정해소 위원회 주최로 공청회를 열었다. 그때 필자는 공술인(주제발표)으로 나가 이런 말을 했다.
“지역감정해소는 요원합니다. 그것은 백년하청을 기다리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한 예를 들어봅니다.(여기서 예술인대회 때 석굴암 논쟁을 상기시켰다) 국가대사는 접어두고 스포츠에서도 충돌을 합니다. 야구만 해도 그렇습니다. 방망이로 공을 때려 홈런이 터지면 즐거워하는 일종의 오락(?)인데 여기서도 충돌을 합니다.
대전 팀 한화는 좀 약한 편인데 어쩌다 이기면 난리가 납니다. 한화차량에 음료수 병이 날아오고 감독을 향해 가래침을 뱉는 등 소란을 떱니다. 그것이 한두 사람의 소행이라곤 하나 지고는 못 견디는 그 체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 그 성깔이 권력이나 경제권을 양보하겠습니까?”
이 말에 대구출신 모 석학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때 김영근 위원장은 대전에도 독설가가 계시군요! 했고, 어느 친구는 대전의 이빨로 나섰군! 이렇게 이기죽댔다. 그래서 필자는 늘 백제문화의 재발견, 충청인의 초상(肖像)을 그린다, 백제사를 다시 쓰자고 일상 외쳐왔다. 백제는 패망국이며 육사는 화랑의 후예이고 신라가 삼국문화를 대표한다는 식의 편견은 이제 버려야 한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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