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발리엔 '녜삐(Nyepi)'라는 명절이 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설'에 해당하는 날인데, 이 날을 쇠고 이튿날, 가족과 친척 친지를 찾아가 용서를 빈단다. 구체적인 잘못부터 확인되지 않은 잘못까지, 자신은 몰랐어도 뜻밖에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단다.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용서를 구하는 행위다. 피해자라면, 그것도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가 가능할까. '오늘'은, 이래도 당신은 용서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에서처럼 이번에도 이야기는 기묘한 동거로 시작된다. 약혼자를 치어 목숨을 빼앗은 소년을 용서한 다혜. 그녀의 집에 아버지의 폭력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민이 들어온다. 용서를 선(善)이라고 믿는 다혜, 그런 다혜를 위선이라고 몰아붙이는 지민. 상반되는 두 사람의 충돌을 통해 감독은 용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풀어놓는다.
데뷔 전부터 구상했다는 이 영화에서 이정향 감독은 긴 시간 묵혀온 고민과 해답을 스크린에 쏟아낸다. “타인의 용서를 훔치지 말라” “대책 없는 용서는 죄악이다” “반성 없는 용서는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등등, 용서의 의미를 쏟아내며 설교한다. 하지만 단단하고 단호한 목소리는 관객들의 가슴에 스며들지 못하고 파편이 되어 튄다. '진정한 용서를 위해선 먼저 자신의 상처를 돌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극중 충고가 무색하게 영화는 조급하다. 대사 또한 차고 넘친다.
“용서는 미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미움을 마음의 가장자리로 밀어놓는 것이에요.” 피해자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다혜의 마음을 흔든다. 게다가 자신이 용서해 준 소년이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수감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혜는 자신의 섣부른 용서가 다른 비극의 씨앗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살인사건 피해자 유가족의 고통을 돌아보게 하고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더 마음 편히 사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짚어낸 점은 수확이라 할 만하다. 불편하고 무거운 영화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은 좋다. '예쁜' 송혜교가 아니라 '배우' 송혜교를 만날 수 있다. '선덕여왕'에서 어린 덕만으로 얼굴을 알린 남지현도 거친 행동에 상처와 슬픔을 담아내는 지민 역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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