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영 출판사 따뜻한손 대표, 전 국무총리실 공보실장 |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카다피에게 비극적 최후를 안겨준 중동·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이 민주주의에 대한 지속적 열망을 상징한다면, 그리스 사태는 우리에게 돈 없이는 민주주의도, 국가체제도 유지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화이트칼라가 중심이 된 월스트리트 시위도 배가 아픈 상대적 박탈감이 배고픈 고통보다 덜 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동양과 서양, 선진국과 후진국을 불문하고 현재는 불안하고 미래는 더 불안한, 불확실성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느낌이다. '여의도를 점령하라'는 도발적 구호가 대선의 전초전으로 변한 서울시장 보선에 묻혀 그리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배고픔과 배 아픔이 뒤섞인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들보다 양호하다고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정부가 조사한 여론을 보더라도 무려 70%가 넘는 국민이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이달 초 발간한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상대적 빈곤은 30개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득(빈곤선)을 100만원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나라 저소득층의 평균소득은 절반 정도(53만원)에 불과했다. 돈벌이를 해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고, 부의 쏠림 현상이 심각해 계층 간 격차가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국민 다섯 명에 한 명꼴로 저소득층이고, 직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섯 명에 한 명은 고용이 불안한 상태다. 여기에 연말이면 정년을 맞는 베이비붐 세대의 대량실직이 예고돼 있다. 퇴직한 지 5년 지나면 30% 이상이 빈곤층으로 전락한다는 암울한 통계도 있다.
과잉 복지 때문이든 탈세 때문이든, 몇 년 전부터 불거져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그리스 재정위기가 국가부도 위기로까지 치달은 데에는 무능한 정부와 부패한 관료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의 20년 불황도 비효율적인 정부 탓이 크다. 소련의 패망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해온 미국이 자국의 신용평가회사 S&P로부터 보기 좋게 망신을 당한 것도 내년 대선을 앞둔 여야 정치권의 알력과 갈등 때문이었다.
지금 세계를 짓누르는 정치·경제적 불안정과 그에 따른 국민의 불만은 일차적으로 각국의 효율적 리더십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내년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중국·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에서 국가지도자를 새로 뽑는 선거의 해다. 경제는 내년에도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지도자가 혜성처럼 등장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내재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까.
사회 양극화 해소부터 국민통합, 그리고 당장의 불황 탈출부터 지속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안고있는 과제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수출기업·대기업에 편중된 정책을 획기적으로 시정하고, 정치권과 관료조직과 시장기능을 혁신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접근조차 쉽지 않은 난제들이다. 선거기간 내내 공동체적 과제를 외면하고 비방과 힐난으로 일관한 정치인들이나, 국제유가는 내리는데 나날이 최고가를 경신하는 왜곡된 시장구조 하나 해결 못하는 관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공동체의 가치를 복원하고 문명사적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페이스북과 같은 인터넷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하여 제 잇속만 차리는 정당정치를 개혁하고, 자본가들은 자각과 혁신을 통해 상생과 조화의 자본주의를 일구어나가야 한다. 정치인과 재벌이 탐욕을 버리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분노한 국민에 의해 변화를 맞게 된다는 것은 최근의 사태가 우리에게 미리 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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