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호 배재대 총장 |
그야말로 '암흑의 핵심'에 든 것이다. 그 어떤 특정 사건에만 귀를 기울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건이 우리 주위에 놓여 있다. 간혹 어느 사건은 그 문제의 근원을 유추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어떤 사건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예의주시해야 할 것인가. 정해진 답은 없다. 어쩌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지금의 이 사건들을 지나칠 것이다. 암흑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최근 후일담 형식의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미 소의 모정'이라는 다소 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는 구제역 살처분 현장에서까지도 새끼에게 젖을 물린 어미 소 모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제역 살처분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는가를 되묻고 있었다. 그 앞에서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가슴 한 켠에 묻어두었던 죄책감이 슬그머니 기어오르고 있었다.
불과 반년전의 일인 구제역 살처분 현장에서의 일을 다시금 회자하는 것은 식상하고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끔찍하고 잔인한 일을 그냥 스쳐 지나온 것은 아닌지. 정부의 무분별한 대책을 이제 와서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정부의 무책임한 정책을 대부분은 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병에 걸린 소는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또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인근의 소를 죽이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고나니, 그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정부의 그 안일한 대책에 조차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 있는 생목숨 수천, 수만이 한꺼번에 꺼져가는 순간에도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타성에 젖은 연민을 의미 없이 텔레비전 앞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소는 그렇게 가까운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은 고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친지 중에 소를 기르는 사람도 없으니 자연히 그 일에 대해서 무감각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사를 접하니 과연 그 죽음들 앞에 그들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는지 되묻게 됐다. 고개를 드는 죄의식, 죄책감에 뒤통수가 두려워졌다. 기사는 너무 시적이었고, 친절하게 링크된 동영상에는 어미 소의 깊은 눈망울과 송아지의 처량한 마지막 식사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현실의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는가. 어쩌면 그 어떤 일에도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감각이 두려워졌다. 그동안 느껴왔던 그 수많은 죄의식과 절망들이 모두 가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죽음과 사건들로부터 무관할 수 없다. 그 죽음과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다 해도 그것들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한 존재의 죽음은 다른 존재의 삶을 담보로 한다.
'우주가 곧 나'라는 크고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슬프고 절망적인 일에 우리는 진정으로 슬퍼하고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혹은 그 상처들이 커지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주의는 내다 버리자. 내 안의 슬픔과 내 안의 절망을 보듬어 안아야 할 때이다.
어쩌면 죄책감의 얼굴은 환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핵심, 우리는 그 속에 있다. 여기서 멈춰버릴지, 아니면 길을 나아가 새로운 희망을 맞이할지는 스스로가 정할 문제다. 세상의 아픔에 무감각해지지 말자. 그리고 그 아픔들이 쉽게 유실되도록 방관하지 말자. 우리가 사는 사회, 잡다하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각자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참여하고 고민할 때 암흑의 핵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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