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일보사가 정부청사 대전유치를 들고 나온 것은 1964년의 일이었다. 초안은 대전 천도(遷都)였으나 민심을 자극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정부청사 대전유치로 수정을 했다. 이후 지역사회개발은 중도일보의 사시(社是)요, 신앙 그 자체였다.
지방지로선 만용이라 할 만큼 거창한 내용들로 그 종목은 아래와 같다. ① 정부청사 대전유치 ② 서산 ABC지구 간척 ③ 대삼선(대전~삼천포 철도유치) ④ 조판선(조치원~판교철도) ⑤ 철도 공작창 대전유치 ⑥ 충무체육관 건립 ⑦ 아산만 개발 ⑧ 대전교육대학 설립 ⑨ 금강지역 개발 ⑩ 대전공업단지 조성 ⑪ 대전 고법, 고검 신설 ⑫ 충청은행 신설 ⑬ 비인 임해공단 조성 ⑭ 계룡산 국립공원 승격 ⑮ 농민의 집 건립 등을 선도했다.
▲ 이웅렬 회장의 저서 유럽·동북아의 인상에 수록된 사진들. 사진은 방송을 통해 정부청사 대전유치를 호소하는 이웅렬 회장 |
정부청사 이전 같은 건 국가적 명운이 걸린 것으로 함부로 거론할 상황이 아닌데도 이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 사장의 지론은 이러했다. 서울은 이제 만원이다. 그래서 인구의 소산(疏散)이 불가피하며 휴전선과 너무 가까워 북괴의 장거리포 사정권에 들어있다. 그리고 서울은 조선조 500년으로 시운을 다한 늙은 도시다. 그러나 새 시대엔 술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일본이 '나라'에서 '교토'로 또 그것을 '도쿄'로 옮긴 예를 들었다. 중국도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고 호주도 그랬다고 날을 세웠다.
이 사장은 박 대통령의 지방순시 때 이를 건의 했고 직접 청와대를 예방했다가 '또 천도론이냐'며 비서실장으로부터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보에 신뢰와 성원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부터였다. 예를 들면 충청은행설립과 충무체육관, 계룡산 국립공원, 농민의 집을 완성하면서부터였다. 농민의 집(운동)에선 '5·16 민족상'을 탄 한인수를 배출한 바 있다.
지역개발 추진위에 참여한 인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충남도 건설과장 출신 이경열(사촌), 도의원 이종신, 사학자 조장천, 충대 공과대학장 이창갑, 충대 민○○ 교수, 도청과장 김수영 등이 그 멤버였다.
이 사장 자신은 건설과 개발에 있어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플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지역개발 전속기자'인 필자 눈엔 일본 것을 본 뜬 것으로 보였다. 그는 유년기에 도일(渡日), 고학으로 간사이 대학 정경학부를 나왔다.
그 바람에 대학동창들이 자료를 보내오고 직접 건너와 자문하는 걸 줄곧 지켜본 일이 있다. 또 한 사람 나카다니(中谷忠治)가 원격지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일제 때 충남도청 관리로 있다가 귀국, 일본 농림성 양정(식량) 국장을 지낸 농업전문가였다. ABC지구 개발은 그의 지식을 산 것이 분명하다. 그는 1960년대초 본보에 '한국의 인상'이라는 글을 실은 일이 있다. 그것을 번역한 필자에게 고우모리(우산)를 선물한 인물이다. 이 사장은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사재로 간척의 나라 네덜란드의 기술진을 초청, 간척과 조력발전 가능 여부를 타진한 일도 있다.
일본에서 책자(자료)가 도착하면 어김없이 필자의 손에 넘겨졌다. 개발 전속 기자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일본 것을 번역하고 기사화는 물론 사장의 연설문, 방송 원고를 써온 탓에 사장 측근이니 '유격기자' 소리를 들어온 필자였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문화부 기자가 훗날 칼럼을 쓰고 사설을 쓰는 주필로 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유럽·동남아의 인상(부록 나의 지역개발 10년)이라는 이 사장 저서를 필자가 대필을 한 바 있다.
▲중도일보와 DJ 간의 신경전=계룡산 국립공원 승격 문제를 놓고 당시 대권을 넘보던 DJ와 중도일보 간에 신경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국립공원 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DJ가 뛰어들어 이를 파기시킨 사건이었다. 이때 본보에서 연일 그를 몰아세우자 DJ가 부리나케 대전에 내려왔다.
당시 지방지의 영향력은 오늘과는 사뭇 다를 때였다. 부산, 대구, 광주, 목포, 인천, 강릉, 수원 등에 지국을 두고 300부 적게는 30부 정도가 나갈 때였다. 부수는 적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중도일보가 고슴도치처럼 껄끄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DJ는 '계룡산 국립공원화'를 돕겠다고 해놓고 이를 뒤집고 나섰다. 이런 지도자라면 충청도민은 그를 다시 봐야한다. '계룡산 국립공원화'가 공단이나 고속도로, 항만, 신도시건설처럼 천문학적인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내쳤다. '이는 이중인격자나 하는 짓이다. DJ는 각성하라'는 요지의 사설과 기사를 연일 실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DJ가 내려왔다. 이웅렬 사장과 필자는 미락식당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를 처음 대한 것은 물론 아니다. 5ㆍ16 이후 대전천 모래사장, 공설운동장 등 대중 집회장에서 수없이 봐온 얼굴이다. 하지만 이런 자리는 처음이다.
▲서산A지구 간척사업 측량 모습. |
이런 식으로 박 정권을 매도했던 그는 타고난 선동 연설가였다. 미락에서 그를 향해 '계룡산 국립공원안' 부결에 대해 따져묻자 그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했다고 웃어넘겼다.
그는 또 이렇게 나왔다.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고 국회에는 화급한 안건이 산적해 있는데 계룡산 문제가 맨 먼저 올라오기에 공화당이 또 장난을 치는구나 싶어 파기시켰다”고 말한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중도일보의 성화에 공화당이 이 안건을 머리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쌍방이 오해를 한 셈이다. DJ는 필자의 손을 잡더니 “안 부장, 대권에 도전하는 내가 처가동네 일을 돕지는 못 할망정 파토를 낼 인물로 보여요? 안 부장 고향이 서산이죠? 내 처가도 서산이인데”라는 말에 짐짓 놀랐다. 그의 처가가 서산인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3시간여 동안 DJ는 남북관계, 한국정치의 병폐 '4대국 보장하의 통일방안' 등을 역설했다. 일을 낼 사람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일화는 또 있다. 서산 ABC지구 기공식 때 있었던 기막힌 사건….
그 행사는 '서해의 지도를 바꾸고 이 고장에 복음을 가져올 경사'라 해서 도민이 환호했던 그런 축제였다. 신문에선 호외를 뿌리고 방송도 흥분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과 전 각료, 내빈들로 법석을 떤 최대의 행사였다. 그래서 전단 수 만장을 찍어 당일 기공식장 상공에 뿌릴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비행기는 군부 것을 빌리기로 했다. 한데 꼭두새벽에 출발한 사장이 연신 호통을 치는 게 아닌가. 공중에서 뿌릴 전단은 실었는가? 다그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군용기에는 기자와 사진기자가 탑승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후 사장이 돌아오면서 편집국 분위기는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인가. 행사장 상공에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니. “이런 놈들 하고 일을 하자니…” 냉수를 들이키는 입에는 게거품이 일고 있었다. 이때 “아니? 그럼 비행기는 어찌되었지?” 사장의 말이다.
전단 살포와 공중촬영은 물 건너갔다 치고 이젠 기자 행방을 걱정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비행기는 제 시간에 귀환했다는 군부의 회신도 받은 상태였다. 비행기 납치, 불시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기자의 행방 걱정까지 겹친 것이다.
이때 두 기자가 축 늘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어 간부들 입회하에 사장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김 기자는 구름 때문에 상공을 헤매다 현장에 이르렀을 땐 이미 행사는 끝난 뒤라 그리 되었다고 둘러댄다. 유인물(삐라)은 그래서 바다에 투하했다며 고개를 떨군다. 군용기는 제 시각에 돌아왔는데 왜 늦었냐고 다그치자 “면목이 없어 시내에서…”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카메라 기자는 할 술 더 뜬다. 비행기를 처음 탄 탓에 어지러워 지금도 제 정신이 아니라고 엄살을 떤다. 이들은 말을 맞춘 게 분명했다.
김 기자는 미리 조종사 입을 막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군인을 조사할 방법도 없고 해서 매듭을 지었다. 김 기자는 당시 전북의 모 초등학교 여교사와 밀애중이었다. 군용기 기수를 서산 아닌 전북으로 돌려 애인이 근무하는 학교 상공으로 날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속대로 애인은 운동장에서 애들과 수업 중이었다. 김 기자는 공중에서, 애인은 지상에서 마주 보며 손을 흔드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다 그만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직무를 버리고 애인을 따라간 사나이'였다. 그는 이어 또 한 번의 실수를 범했다. 여 교사와의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리 청탁을 받은 터라=주례는 미리 이 사장에게 부탁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ABC지구 기공식 때 일로 내키지 않지만 이 사장은 주례를 맡았다. 결혼이란 이성지합이며 백복지원이라는 등 주례사를 끝내고 양가 어른에게 절을 하는데 '아빠!' 하고 꼬마 아이가 튀어나와 신랑에게 매달렸다.
결혼식장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심지어 '사기결혼이다'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문제아는 늘 이렇다니까!' 주례는 대머리를 연신 쓸어 넘기며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김 기자가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전국체육대회(광주) 취재차 남행열차에 탔을 때였다. 흰색 체육복에 '보도'라는 완장과 카메라를 멘 그에게 호감이 갔던 모양이다. 1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이뤄진 결혼식이었다. 전처에게서 낳은 딸 하나가 있었지만 이를 숨겨왔고 시종 총각행세를 해왔다. 결혼 당일 딸애의 단속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한 소동이었다. 이후 김 기자는 사장의 미움을 산 끝에 중앙지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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